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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by 디어샬럿 2016. 8. 22.




어쩌면 모든 예술의 뿌리는, 또한 어쩌면 모든 정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 앞에서 몸서리를 치며,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면 슬픔에 빠지는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우리 역시 덧없이 스러져갈 것이며 조만간 시들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법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면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로부터 구해 내려고 애쓴다. 우리 자신보다도 더 오래 지속될 무엇인가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p.245)



처음으로 감동을 받은 고전문학이 <데미안>이었다. 책은 초등학생을 겨냥한 문고판이었다. 돌이켜보면 번역도 여기저기 덜컹거리고, 삽화는 애처로운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 소설은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고만고만한 그림들 중에서도 싱클레어가 보낸 새 그림만은 나름의 공이 깃들었던, 덕분에 예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문구를 더욱 극적으로 기억할 수 있었던 그 작은 책은, 헤세의 이름을 마주할 때마다 이따금 떠오르곤 한다. 그래설까. 헤르만 헤세는 내게 '10대의 상징' 같은 느낌이다. 

이 책에서도 싱클레어와 데미안에 버금가는 친구가 등장한다. 이름하야 제목처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러나 실질적인 주인공은 골드문트나 마찬가지라 봐도 무리는 없을 정도로, 헤세는 그의 방황과 고민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학식이 높고 차가운 성격의 나르치스와 밝고 감성적인 골드문트는 수도원에서 금세 친구가 된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내면에 자리한 감성의 비범함을 알아챈다. 그는 골드문트가 수도원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하룻밤으로 사랑의 쾌락을 알게 된다.

이후 골드문트의 인생은 극적인 도약과 급작스런 허무의 연속. 수도원을 뛰쳐나와 떠돌아다니며 육욕과 살욕, 죽음과 허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가까스로 만난 사랑할 것들에 뒤쫓아오는 이별과 사멸의 고통은 그의 인생 전반을 불안하게 뒤흔든다. 대지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방랑자를 자처하지만, 흑사병 앞에서 인간의 악성을 처절히 목도하고 죽음의 근린을 자각하기도 한다. 방랑을 거듭할 수록 그에겐 삶의 덧없음이 켜켜이 마음에 내려앉을 뿐이다. 그리고 예술이, 유한을 뛰어넘는 영원의 통로로써 그에게 다가간다.

골드문트는 사랑했던 이들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들과 그 자신의 세상에 기억되기 위해서다. 극적으로 나르치스와 재회한 후, 그는 수도원에서 조각에 몰두한다. 나르치스는 친구의 조각 앞에서 더없이 경건해진다. 자신이 고집했던 진리에의 길이 예술을 통해서도 다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마지막 방랑과 죽음을 지키며, 나르치스는 자신이 골드문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한때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지(知)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됐다. 나르치스가 이성과 앎, 신학과 철학의 상징이라면 골드문트는 감성과 사랑, 예술을 대변한다. 죽음 앞에서 빚어낸 골드문트의 역작은 결국 두 영역의 합치를 의미하는 셈이다. 이성적 통찰을 통해서만 삶을 성찰할 수 있다는 통념을, 헤세는 골드문트라는 '예술적 인물'을 통해 부수어낸다.

방황과 고민으로 성장하는 한 인간과, 그를 변함없이 믿고 지지하는 영혼의 친구. 헤세를 읽으면, 새삼 내 모든 인연이 소중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우리가 헤세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와 같지 않을까. 그가 영원한 청춘의 작가로 불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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