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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가 전부 그럴듯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허구는 모두 어느 정도 사실에서 출발한다. 야구 기록원은 어릴 적 꿈이었고 법대에 진학해서 사법고시를 보라는 부모의 압력 속에 십대를 보냈으며 언젠가는 독창적인 스파이 소설을 써보리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니, 흐릿한 조명 밑에서 다리를 떨며 즉흥적으로 지어낸 삶들은 이 세계와 나란히 달려가는 어떤 세계에서 또 다른 내가 꾸려가는 인생일 수도 있었다. 평행우주이론이 뭔지는 몰라도, 무심코 내린 작은 선택으로 나를 비껴간 숱한 삶을 상상하다보면 정신이 바늘구멍을 드나들 만큼 날카롭게 집중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바늘구멍으로 다른 세상을, 이 광대한 우주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곤 한다. (pp.44-45, 김경욱 <양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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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챙겨 읽은 지도 7년째. 김연수가 시작이었던가. 지켜본 대상만도 박민규, 공지영, 김영하, 김애란, 편혜영, 김숨이다. 모두를 좋아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올해는 김경욱. 십여 년 전 소설로 기억했던 그의 소설은 분명 뛰어났지만, 어딘지 마무리가 빈약한 느낌이었다. 이상문학상 대상으로 만난 그는 놀랍게 발전해 있었다. 문단에서도 소문난 다작가. 시간과 공간의 빗금에서 수없이 쓰고 다져온 결과일 것이다. 고요하고도 치열했던 노력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들이었다. 수상작 <천국의 문>은 물론 자선 대표작인 <양들의 역사>도, 문학적 자서전인 <아버지의 무릎>까지도 선정된 작품들 중에선 단연 돋보인다. 나이가 들어 틈을 둘 줄 알게 된 중견작가의 관록이 묻어난다. 윤성희 작가가 쓴 축문은 여태의 그것들 중 가장 빛이 난다.
우수상 수상작은 다른 해보다 수가 줄었다. 딱 다섯 편. 다른 때는 일고여덟 정도였다. 작가들로선 기회가 덜 돌아간 셈이지만, 독자는 작품에 집중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본의 아니게 가장 주목한 이는 김탁환. 확실히 영상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 상당수가 영상콘텐츠로 재탄생된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닌 듯하다. 특유의 작위적인 느낌은 좀 부담스럽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흐름' 잡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건 인정해야 할 듯하다. 내 취향은 아닌 글이지만 수상의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김이설의 소설은 고민은 묵직하나 글이 미끄러진다. 윤이형의 소설은 흥미진진하고 메시지도 두터우나 시작과 끝의 상관관계가 매끄럽지 못해 아쉽다. 정찬의 소설은... 아프다. 황정은의 소설은 익히 들어오던 그녀의 역량에 못 미쳤다는 느낌이다. 여느 때에 비해 이상문학상에서만은 낯이 익지는 않은 이름들이었다. 다른 글에서라도 인연이 닿길 바라며. (201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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