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pp.12-13)
내겐 쿤데라를 향한 첫 여정인 책이었다. 첫인상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밤하늘의 급작스런 섬광 같은 눈부심이었다. 그만치 강렬했고, 겪은 적 없는 충격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밀란 쿤데라는 이런 작품을 쓰는구나 싶었달까. 책을 덮은 후에도 뭉근한 여운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계기로 쿤데라 전집을 하나하나 읽어갔으니,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 돌고 돌아도, 삶은 한 번 뿐
책은 제목처럼 시종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나든다. '무게'를 찬양하는 통념에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가벼움의 다각적 의미를 그려낸다. 철학적 담론과 원시적 탐닉이 넘실대는 이야기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역설의 수단으로써, 도입부터 파르메니데스와 베토벤과 함께 등장한다. 이 세 인물의 사상은 이후 끊임없는 변주를 통해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작가는 삶과 사랑 그리고 인간의 경중(輕重)을 치밀하게 파고든다. 동시에 그 속에 잠재한 모순을 찾아낸다. 사실 모순은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이죽이죽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독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곧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임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플롯과 인물들에 한정한다면 전자로 읽힐 것이고, 쿤데라가 내내 전면에 내세우는 철학을 따르자면 후자로 읽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소설의 내용과 동떨어지지 않는다. 방점을 어디 찍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듯도 하지만, 또 영 다른 이야기도 아니다. 모순과 합리가 묘하게 뒤섞이는 지점이다.
플롯의 구조도 이 미세한 혼돈에 한몫한다. 토마시와 테레자, 프란츠와 사비나의 이야기가 소제목을 단 각 장을 따라 병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거기다 쿤데라 특유의 에세이 식 문장들이 이야기 곳곳에 침투된 탓에, 정신 놓고 읽다보면 서사줄을 순식간에 놓쳐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핵심은 토마시와 테레자의 관계성으로 향한다. 무한한 순환 속에 혹은 끝에 어느 지점으로의 집중이 이뤄지며, 이야기는 인물들의 급격한 성찰 및 타협과 함께 결말로 치닫는다. 회귀에의 강한 회의와 야릇한 긍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인물은 물론 문장마저 '니체의 바퀴'를 돌고 도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 법도 하다. 그리고 종국에 쿤데라는 남긴다. "인간의 삶이란 단 한 번 뿐이고, 주어진 선택도 한 번 뿐이다." 인생과 결정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일 터다. 우리 개개인의 삶에서는 물론 역사에서까지도. 작가는 토마시와 테레자를 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현대사를 중간중간 언급하면서 논지를 더욱 탄탄히 다져나간다. 그리고 덧붙인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어쩌면 마주할지 모르는 타의적 선택과,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허무를 인정하는 것 역시 삶의 의미라고.
# 무거운 것은 가볍고, 가벼운 것은 무겁다
책은 단연 자타공인 쿤데라의 대표작이다. <웃음과 망각의 책> 즈음부터 더욱 도드라진 '순환'과 '무거움'이라는 키워드는 "참존가"에 이르러 정점을 맞는다. <농담>에서부터 줄곧 이어지듯,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도 '무게'의 획일성에 과감히 반기를 든다. 작가는 역설한다. 무거운 것이 실은 한없이 가벼울 수 있고, 가벼운 것이 반대로 무언가를 대하는 가장 무거운 방법일 수도 있다고. 이 모순이야말로 "참존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구 소련의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로의 망명을 택한 작가 개인의 경험이 가장 진하게 녹아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기도 하다. 무거움 혹은 진지함으로 대변되나 사상적으로는 빈곤하기 그지없었던 공산주의와, 그로 인해 피폐해진 체코의 현대사를 작가는 몇 권에 달하는 저서를 통해 비판해왔다. 무게를 향한 일률적인 시선, 관조적 성찰을 허용치 않는 숨막히고 우둔한 '무거움'을 냉소하고 조소해 오기도 했다. '무거움'에 몰두하다 보면 산재한 불합리를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는 것, '가벼워질 줄 아는' 관조의 시선이 때로는 객관적인 성찰의 계기가 된다는 점을 일갈하는 것이다. 한 발자국 떨어질 줄 아는 것의 미학이랄까.
때문에 얼핏 가벼움과 무거움의 상징으로 보일 수 있는 토마시와 테레자조차, 실은 각자의 영역에서의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의 이행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그들은 섹스와 사랑이라는 각자의 관심사에 지나치리만치 몰두해 있었다. 그것을 잃었을 때 찾아올 허무가 두려워 그토록 각각의 것에 집착했던 셈이다. 결국 토마시는 조금씩이나마 테레자를 향한 마음을 깨닫고, 테레자는 토마시에의 집착을 벗어던지면서 '중간지대로서의' 가벼움을 회복해 간다. 타인의 선택을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된다. 언젠가 닥칠 허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책은 딱 쿤데라 답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은 물론 음악과 문학에의 색이 뚜렷한 주관까지 잘 어우러져 있다. 특히 '프라하의 봄'으로 말미암아 작가 자신의 평생의 트라우마이자 작품들의 배경으로 남은 잿빛 우울은, 늘 그렇듯 이 소설에서도 날카롭게 벼리어 있다. 감히 쿤데라 세계의 집약체라 치켜세워지는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글쎄.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이 작품이 나의 '베스트 쿤데라'는 되지 못한다. 소설(小說)이라는 단어로 감히 담아낼 수 있을까 싶은 거대한 세계가, 허구와 실존과 허구 속의 허구를 쉴 새 없이 오가는 방대한 플롯이 오롯한 몰입보다는 그저 무릎을 꿇어야만 할 것 같은 장엄함으로 드리워온다. 가벼움을 역설하지만 역설적으로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책.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쿤데라 작품 중에서 <농담>을 가장 좋아한다. 그나마 그의 작품 중 가장 '소설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러모로 이 책은 내게 처음의 감각으로 기억된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늘 처음 마주하는 듯한 부분이 생긴다. 여기저기 접어둔 문장을 찾다가 다시 책을 들춰보면, 언제나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이야기에 휘말려 들어가곤 한다. 채 발견치 못했던 공백을 찾아냈을 때의 환희란. 이런저런 무거운 내용들 속에서 보물찾기마냥 '가벼움'을 읽어내는 과정이 이 책의 묘미다. 가벼움도 이렇게나 색이 다양할 수 있구나 하고,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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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다. (p.60)
-- 베토벤은 희극적 영감을 진지한 4중주로, 농담을 형이상학적 진리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이것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의 전이라는 흥미로운 예다. 이상한 노릇은 이 환골탈태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으로 베토벤이 4중주의 진지함으로부터 뎀브셔의 지갑에 대한 4중창에서 보여 준 가벼운 농담으로 변했다면 우리는 분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히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부합한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불완전한 초고 형태로서) 형이상학적 진리였지만 끝에 가서 (완성된 작품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농담이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우리는 더 이상 파르메니데스처럼 사고할 수는 없다. (pp.31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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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물론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 이런 것을 정치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근처에 카메라가 있으면 그들은 눈에 띄는 첫 번째 아이에게 달려가 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뺨에 키스한다. 키치는 모든 정치인, 모든 정치 행위의 미학적 이상이다.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화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pp.40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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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어에서 파생된 모든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접두사 ‘콤(com-)’과 원래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파시오(passio)’로 구성된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 … 그래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의심쩍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랑과는 별로 관계없는 저급한 감정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동정 삼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p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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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했다.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pp.63-64)
--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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