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윈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은 지구 이외의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지구에만 있다. 인간은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자그마한 행성에서만 사는 존재이다.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p.674-675)
이과와는 인연이 적었다. 과학은 특히 쥐약이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내게 과학이란 참 차가운 학문이었다. 흥미 여하의 문제가 아니었다. 싫다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꽤 최근까지도 타고난 문과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해 왔다. 이 책을 읽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 건 그 때문이다. 절친한 S와 나라비에서 밥을 먹다 우연히 추천받은 때가 아마 5~6년 전일 테다. 밥알까지 튀겨가며 S는 너 이거 꼭 읽어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다. 그에게 미안하게도, 그땐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 분야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다분히 편식에 가까운 내 독서습관도 이 책을 선뜻 시작하지 못한 원인이었다. 어쨌든 읽어야 할 것 같아 사긴 사뒀다. 그렇게 숙제처럼 고이 모셔두고만 있었다.
읽은 건 최근이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후회했다. 왜 좀 더 일찍 읽지 않았을까. 우주는 아름다웠고 과학은 위대했다. 인간과 삶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야말로, 내가 <코스모스>에서 읽어낸 과학이었다. 차가운 학문이 아니었다. 외려 그 어느 것보다도 뜨겁고 열정적인 분야였다. 선입견이란 얼마나 사람을 미련하게 하는지. 나는 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스스로의 오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만 낭만적인 줄 알았더니, 과학이 이렇게나 로맨틱할 줄은 처음 알았다. 방대한 휴머니즘은 또 어떤가. 우주를, 그리고 현대과학을 논하지만 그 어떤 책보다도 인류에 대한 진한 사랑이 묻어나고 있었다. 책은 칼 세이건이 보내는 생과 존재에 대한 경외로 가득하다.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문학서사를 읽은 느낌이랄까. 인간과 우주, 별과 삶이 한 궤를 공유하는 거대한 플롯의 세계 같았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동안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주과학의 필독서라는 한정된 말로 표현하기엔, 그 말에 가리워 놓칠 것이 너무나 많다.
물론 누군가에겐 어딘가 부족해보이는 책일 수도 있다. 가장 큰 건, 시간차에 기인하는 부분이다. 칼 세이건이 이 책을 낸 건 1980년이다. 그전에 세이건이 직접 진행자로 나섰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근간으로 했으니 근 40년 전 내용이다. 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새롭다. 반세기에 이르는 간극은 어마어마하다. 그때와 비교하면, 과학의 영역에선 지금은 별세계라 느껴지리만치 새로운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천문학도 다르지 않다. 당시엔 센세이셔널했겠지만 지금 와선 새삼스럽게 읽히는 부분이 제법 등장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명왕성(소행성130340)의 진수를 지구인에게 알린 뉴호라이즌스 호의 존재도, 4단계에 이르는 다중우주론도 등장하기 전이다. 그러나 당대로선 탐사와 촘촘한 이론으로 증명된 최신의 사실들을 실었다. 바이블은 시대를 막론하고 바이블이듯, 이젠 진리가 된 사실을 실은 필독서로 너그러이 혹은 숭고히 봐 주어도 될 것이다.
과학서적임에도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건 오롯이 칼 세이건의 역량이다. 무엇보다, 참 쉬운 책이다. 우주서적이지만 초끈이론이니 통일장이론 등까지 갈 것도 없다. 책은 입문서이자 필독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정도다. 태양계 행성들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우주탐사의 과거와 현재, 외계문명의 가능성, 우주의 미래와 지구인의 자세가 13장의 분량으로 다뤄지는 내용.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우주를 풀어낸 것이다. 어려운 이론은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우주의 다면모를 최대한 쉽게 알려주려는 세이건의 노력이 읽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쉬운 책 한 권을 위해 세이건이 들인 공은 보기에도 엄청나다. 천문학의 외피를 썼지만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은 물론이거니와 역사학과 철학, 문학까지 전 학문을 아우른다. 천문사에 곁들여진 철학적 첨언, 철학가에 대한 평가, 각 장 머리마다 적확하게 인용된 소설 구절까지. 과학자인지 인류통사 저자인지 모를 세이건의 지적 깊이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풍부한 어휘와 적재적소의 비유는 어떻고.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문장을 음미하다 보면, "운 좋게도" 별을 곁에 둔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마저 든다 - 우주의 9할은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은하계에 떨어질 확률이라면 엄청나게 운이 좋은 거라 세이건은 말했다 -. 게다가 비록 세 번째인가 네 번째 결혼이긴 했지만 부인 앤 드루얀에 바치는 곳곳에의 사랑의 흔적까지... 과학자가 이쯤 되면 반칙 아닌가?
---
-- 지구 생물에게는 단 한 가지의 생물학만으로 충분하다. 생물학을 음악에 비유해 볼 때, 지구 생물학은 단성부, 단일 주제 형식의 음악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말이다. … 우주 생물이 들려줄 음악은 외로운 풀피릿소리가 아니라 푸가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우주 음악에서 화음과 불협화음이 교차하는 다성부 대위법 양식의 둔주곡(遁走曲)을 기대한다.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를 듣는다면, 지구의 생물학자들은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pp.66-67)
-- 사람 한 명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각종 분자 물질을 화공 약품 가게에서 구입하면 돈이 얼마나 드나 알아봤더니, 약 1000만 달러라는 계산이 나왔다. 내 몸값이 이 정도 나간다니 기분이 약간은 좋다. 그러나 필요한 분자들을 다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병 안에 넣고 흔들어 섞는다고 해서 거기서 새로 사람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훨씬 넘는 일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앞으로 아주 긴 기간 동안에도 인간의 능력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 내 생각에는 다른 많은 외계 세상들에 존재할 법한 생물도 대부분 지구의 생물과 동일한 원자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다. 원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분자 수준에서도 아마 많은 세상의 외계 생명들이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지구 생물과 동일한 기본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합의 방식은 우리에게 낯선 것일지 모른다. (pp.263-264)
-- 오리온 대성운과 같은 고밀도의 성간운 복합체 내부를 살펴보면 많은 수의 별들이 한꺼번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새로 태어난 별들이 ‘신생아실’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은하수 은하에서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찾아간다.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젊은 별들은 실타래같이 빛나는 엷은 가스 성운을 자기 주위에 달고 다닌다. 이 가스 성운은 별들의 자궁이랄 수 있는 성간운에 있던 기체 찌꺼기로서 어머니 성간운과 신생아별이 아직도 중력의 끈으로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 사람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같이 태어난 형제 별들도 나이를 먹을수록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만날 기회가 거의 없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억 년 전 같은 암흑 성간운에서 태양과 같이 태어난 열대여섯 개의 형제자매 별들이 지금은 은하수 은하의 이 구석 저 구석에 흩어져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별이 우리 태양의 형제요 자매인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은하수 너머 어딘가에 있겠지”라고 막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pp.447-448)
이 단락,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소설도 이렇게 쓰긴 힘들 것 같다.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알고 지내는 원소들의 과거를 되돌아보자. 그것들은 일단 별 내부에서 합성되어 성간 공간으로 나간 다음, 거기서 성간운의 구성 성분으로 남아 있다가, 그 성간운에서 중력 수축이 이루어지면 그 결과 차세대의 별과 행성의 구성 성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곁에 가까이 올 수 있었다. 사실 원자적 수준에서 본다면 우리도 그런 경로를 거쳐서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성분인 철, 애플파이에 들어있는 탄소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pp.457-458)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이 문장은 2014년판 다큐멘터리에서 그대로 인용됐다. 함께 다큐를 보던 아빠는 너털웃음과 함께 무릎을 탁 치셨다. 기가 막힌 문장이다.
-- 지구에서 송신되는 전파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나가고 가장 쉽게 인지될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 방송신호이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한 방송국이 지구의 지평선 밑으로 사라질 때 반대편 지평선에서는 또 다른 방송국이 떠오를 것이다.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계인에게는 지구의 여러 방송국들이 송출하는 다양한 전파신호가 한데 섞여서 처음에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으로 수신될 것이다. 이웃 문명권의 거주자들이 매우 현명하다면 그들은 수신된 신호를 잘 분해하고 다시 짜 맞춰서 의미 있는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 지구인이 우주로 내보내는 방송의 내용이란 것이 아무 생각 없는 수많은 상업광고, 끊임없이 언급되는 국제분쟁과 위기, 가족 구성원 간의 지지고 볶는 불화가 고작이라니, 어떻게 우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선별’하여 우주로 내보내는 내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해 볼 일이다. (p.572)
p.s 2014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새로운 버전의 13부작 <코스모스>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최신 지식을 보강한 덕에 이미 책을 읽은 이도 새로운 감각으로 볼 수 있다. 시간날 때마다 가족들과 IPTV로 보고 있는데 정말 재밌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현란한 CG에 입이 떡 벌어진다. 2014 버전의 다큐멘터리 각본은 앤 드루얀이 맡았다. 드루얀은 코스모스 스튜디오의 총 책임자이기도 하다.
'평론과 편린 사이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의 날들>, 나딘 고디머 (0) | 2015.07.28 |
---|---|
<멀베이니 가족>, 조이스 캐럴 오츠 (0) | 2015.07.25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0) | 2015.07.21 |
<전쟁과 악기>, 이청준 (2) | 2015.07.19 |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0) | 2015.07.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