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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거짓의 날들>, 나딘 고디머

by 디어샬럿 2015. 7. 28.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기억의 작동, 어쩌면 그것은 욕망의 시작이며 어린 시절의 끝인지도 몰랐다. 기억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하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고 결국 나이가 들어가면서 희미해지는 갈망이라고나 할까. 』(p.100)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은 묘했다. 공기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무언가 몽글몽글 그려지기 시작한 건 시간이 좀 지나서였다.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우울한 사춘기의 기록. 가만히 떠올린 이 책을 향한 인상은 그랬다. 책장마다 스민 불안이 한낮에 흐르다 식은 땀처럼 끈적끈적 눌러붙어 있는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파동이, 책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소설은 한 소녀의 성장기에 가깝다. 그다지 유난스러울 것 없는 사춘기에 대한 독백이랄까. 나딘 고디머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서사는 담담하다. 어른의 계기와도 같은 갑작스런 풋사랑과 아직 설익어 떫은 향만 남은 회의주의, 운명마저 태울 기세로 불타올랐지만 시간의 손길에 무심히 꺼져버린 어느 연애까지. 소녀에서 여성이 된 여느 청춘들의 그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한 시대에 내리는 조용한 심판이기도 하다. <거짓의 날들>은 연방에서 공화국으로 변모하는 시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 작가는 근현대 남아프리카를 관통하던 갈등과 만연한 불안, 점철된 모순을 특유의 무심한 문체로 그려내면서도 사회의 무감각과 폭력을 통렬하게 새겨넣는다. 책은 변화의 시간들을 서술하지만 결코 목청을 돋우지 않는다. 다만 음울하게 읖조릴 뿐이다.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어느 날들에 관한 차분한 보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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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편지를 읽었다기보다는 문장들 속을 날아다녔다. 그렇게 날아다니다가 '너'라는 단어에 가끔 내려앉았다. … 나는 문장들 위를 떠돌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 단락에 이르자 이윽고 섬이 나타났다. 작은 섬이어서 그것을 탐색하는 일은 금세 끝났다. 거기에 내 마음이 내려앉았고, 나는 그 깃털 속에 부리를 비볐다. 나는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그는 내 생각을 하고 있다. … 나는 어떤 문장은 열 번도 넘게 읽었다. 큰 소리로 읽으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를 달리 해서 읽으니 다른 의미를 띠고 다가왔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호한 것 같았다. 새가 햇빛을 가르며 날 때 깃털의 색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듯이, 행복감이 왔다 갔다 했다. (pp.146-147)

 

 

-- 문학이나 예술의 전통이 없고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을 지배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신생 물질주의적 사회에서는 … 한쪽으로는 유럽 문화라는 가는 실에 묶이고, 다른 쪽으로는 종족이라는 거대한 실타래에 엉켜 균형을 잃고 있었다. … 그들은 아이의 등에 한사코 달라붙는 죄의식이라는 괴물처럼 언제나 흑인을 의식하며 먹고, 자고, 일하고, 숨 쉬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들에게 생겨난 욕망은 결과적으로 다른 나라 젊은이들보다 더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었다. 집에서 편안하게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좌절한 젊은이의 열망은, 한 포기의 풀에 붙은 작은 불길이 옆으로 번지듯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던 다수 흑인들의 상황을 인식하는 쪽으로 번져나갔다. 만약 그들이 자기 부모가 가진 것과 엇비슷한 돈과 문화적 척도를 갖고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면, 수탈당하는 사람들이 울부짖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그들은 …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찾는 과정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엄청난 결핍을 갑작스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pp.256-258)

 

 

-- 내가 주변의 흑인들을 가구, 나무, 내 인생이 지나가는 도로에 있는 표지판과 같은 것이 아니라 노인과 소녀, 어린아이 같은 사람의 얼굴로 구별해서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사는 모든 백인들이 사는 동안 어느 지점에서 경험하듯 그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서는 무엇인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서서히 갉아먹는 죄의식이었다.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고,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공기처럼 형태가 없었으며, 남아프리카 백인들이 시인하든 하지 않든 그들의 목소리만큼이나 특이했다. 그것은 흑인 죄수 노동자들을 발로 차고 구타하는 백인 민족주의자 농부에게도 있었고, 내 안에도 있었다. 우리는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는 모호한 고통처럼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발로 차고 욕을 하면서 죄의식을 자기로부터 조금 떼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 약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것이 거친 모직 셔츠처럼 몸에 들러붙을 수도 있는 법이다. (p.342)

 

 

-- 이제는 백인민족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앉아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흑인들을 모욕하고 있었다. 장관들은 의회에서 흑인들을 '검둥이'라고 불렀다. '남아프리카 백인들의 순수 혈통'을 보존하고 '순수한 아프리카너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신성한 의무'에 대한 공식적인 토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흑인들은 언제나 버림받은 사람들이었고, 이제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황하고 적의를 띤 조롱하는 듯한 눈으로, 백인이 그들에게서 찾아낸 상처를 들쑤셨다. (p.418)

 

 

-- "홍수나 지진을 예로 들어보자고. 그런 천재지변은 지나가게 돼 있어. 그것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다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우리 마음속의 천재지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되풀이된다는 데 문제가 있어.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그런 상태가 몇 년 동안 계속될 수도 있어. 거미한테 잡혀 마비된 뒤 아직 먹히지 않은 파리처럼, 백인민족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우리는 이십여 년 동안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을 거란 말이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핑계로 이것도 보류하고 저것도 미뤄놓고 말이야. … 이게 우리의 삶이야.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거야. 이건 휴식기가 아니야."

 

" …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너도 알잖아. 우리가 몸부림치고 안간힘을 쓴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래,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정치적 항의를 거세게 하고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 우리는 일상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항의를 하는 셈이지. … 문제는 우리 안에 있어. 뭐랄까, 우리의 운명을 붙잡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개별적인 의식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건 비정치적인 거야. 우리는 바로 그걸 옆으로 제쳐둔 채 뒤로 미루고 있다고." (pp.473-475)

 

 

 

 

 


거짓의 날들

저자
나딘 고디머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14-09-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나딘 고디머의 첫 장편소설 ‘최고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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