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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개와 늑대의 시간 ::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by 디어샬럿 2015. 7. 18.

 

 

 

 

 

  벌써 땅거미가 지는군. 영빈은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소리를 이렇게 돌려 말하곤 했다. 그러면 현금은 아니야, 지금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맞받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나는 그 반대야.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게 바로 이 시간이야.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도 나는 그 말이 좋아.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게 만날 만날 낯설어. 너무 사나워서 겁도 나구, 나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긴장해봤댔자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기껏해야 잘난 척하는 게 고작이지.


  그렇게 위협적인 세상도 도처에 잿빛 어둠이 고이기 시작하면 슬며시 만만하고 친숙해지는 거 있지. 얼마든지 화해하고 스며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세상으로 바뀌는 시간이 나는 좋아.

 

 

 

-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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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박완서 작가를 가장 좋아하기도 했다. 다작한 작가라면 근 첫 손가락에 꼽힘에도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거의 다 가지고 있을 정도. 꾸미거나 고민한 흔적이 없는 유려한 문장에 그렇게나 끌렸다. 연륜의 힘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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