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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미해결의 장>, 손창섭

by 디어샬럿 2015. 7. 18.

 

 

 

 

 

 

  초등학교의 그 콘크리트 담장에는 사변 통에 총탄이 남긴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나는 오늘도 걸음을 멈추고 그 구멍으로 운동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침 쉬는 시간인 모양이다. 어린애들이 넓은 마당에 가득히 들끓고 있다. 나는 언제나처럼 어이없는 공상에 취해보는 것이다. 그 공상에 의하면, 나는 지금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병리학자인 것이다. 난치의 피부병에 신음하고 있는 지구덩이의 위촉을 받고 병원체의 발견에 착수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박테리아에 의해서 발생되는 질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도 그 세균이 어떠한 상태로 발생, 번식해 나가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치료법에 있어서는 더욱 캄캄할 뿐이다. 나는 지구덩이에 대해서 면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다. 아직은 활동을 못 하지만, 고것들이 완전히 성장하게 되면 지구의 피부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야금야금 갉아먹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병균에 침범당해, 그 피부가 는적는적 썩어 들어가는 지구덩이를 상상하며, 나는 구멍에서 눈을 떼고 침을 뱉었다.

 

 

- 손창섭, <미해결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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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한 번은 독파하고 싶었던 작가였다. 단어 하나하나를 휘감아 도는 짙은 회의감과 무거운 우울로 기억되는, 삶마저도 예기치 못한 파격으로 가득했던 인물이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손창섭 단편 모음집은 그래서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둠이 바투 다가오는 것 같다. 위트라고 배치한 것도 어둡기 그지없었지만- 결론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태생적 현실에선 희망을 찾지 못했던 젊은 작가의 매력적인 울증을 엿볼 수 있었달까. 수려한 문체 덕일 테다.

 

  작가는, 잘 알려진 것처럼 전쟁 이후 일본으로의 귀화를 택했다. 어떤 의미에서든 문장에 충실했던 삶을 살았던 작가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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