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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대심문관 ::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표트르 도스토옙스키

by 디어샬럿 2014. 12. 29.

 

 

 

--  이봐, 알료샤, 모든 인간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그 고뇌로써 영원히 조화를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무엇 때문에 어린애들까지 그 속에 끌어들여야 하느냐 말이야? 그걸 나한테 말해줄 수 없겠니? 무엇 때문에 어린애들까지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 고통으로써 조화를 보상해야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무엇 때문에 어린애들까지 재료 속에 끼어들어 남을 위한 미래의 조화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거냐?  (p.400)

 

 

--  광야에서의 첫째 물음은 바로 이런 뜻을 지니고 있는 거야. ...그것은 "누구를 숭배할 것이냐?" 하는 의문이지. 자유를 누리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괴롭고 해결하기가 어려운 문제는 한시 바삐 자기가 숭배할 인물을 찾아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인간은 틀림없이 숭배할 만한 가치를 지닌 대상만을 찾고 있어. 만인이 다 같이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틀림없는 대상을 찾고 있는 거야. 왜냐하면 이 가련한 생물들은 그들 각자가 숭배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만인이 신앙하고 만인이 다 함께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그런 대상을 찾기 때문이지.

 

  이러한 공통적인 숭배의 요구야말로 세상이 시작된 그날부터 개개의 인간 및 전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거리가 되어왔다. 숭배의 공통성이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휘두르며 싸워왔어. 그들은 자기네 신을 창조해 가지고 서로 자기 쪽으로 불러들였어. ...이런 상태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니 이 세상에서 신이라는 신이 모두 소멸될 그때까지도 계속될 거다. 신이 없으면 그들은 우상 앞에라도 무릎을 꿇을 테니까.  (pp.416-417)

 

 

--  너는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양심을 증진시켜 그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의 왕국에 영원히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 않았느냐 말이다. 너는 너에게 유혹되어 사로잡힌 인간이 자유의지로써 너를 따라올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랐다. 그 결과 인간의 확고한 고대의 율법을 물리치고, 그 후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거다. 게다가 지도자라고는 그들 앞에 너의 모습밖엔 없었던 거야. ...너는 그처럼 많은 걱정거리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들에게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혼란과 고통 속에 남아있게 했기 때문이지. 사실 그 이상으로 잔인한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렇게 너는 스스로 자기 왕국의 붕괴의 기초를 만들어 놓았으니 누구를 비난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을 거다.  (p.418)

 

 

-- 너는 물론 이런 자유의 아들, 자유로운 사랑의 아들, 너의 이름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위대한 희생을 바친 아들을 자랑스럽게 가리켜 보일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것은 몇 천 명에 불과한, 거의 신이나 다름없는 인간들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대체 그 나머지 인간들은 어떻게 된다는 건가? 그런 위대한 인간들이 참고 견디어낸 것을 그 밖의 약한 인간들이 참아내지 못했다 해서 그들을 책망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와 같은 무서운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여 연약한 영혼들을 책망할 수는 없지 않느냐 말이다. 아니면 너는 선택된 자들을 위해, 선택된 자들한테 온 데 지나지 않는다는 거냐?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곧 신비에 지나지 않는 거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신비라고 한다면, 우리도 신비를 선정하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양심의 자유로운 결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며 오직 신비가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양심에 거역하더라도 이 신비에 맹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설득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대로 해 왔다. 우리는 너의 사랑을 수정하여, 그것을 '기적과 신비와 교권' 위에 세워 놓은 거다. 그러자 민중은 다시 자기들을 양떼처럼 이끌어줄 사람이 생기고 끝없는 고통의 원인인 그 무서운 선물을 마침내 제거해줄 때가 온 것을 기뻐했다.  (p.421)

 

 

--  "형님의 그 심문관은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노인의 비밀의 전부입니다!"
 

  "그래도 좋다! 드디어 너도 알아챘구나. 사실 그렇다. 사실 그의 모든 비밀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거야. 그는 광야의 고행에서 일생을 망쳐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전히 인류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었던 사람이야. 그는 자기 생애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그 위대하고 무서운 악마의 충고만이 연약한 반역자들 ― '조소의 도구로 창조된 미완성인 시험적 생물'을 다소나마 견디기 쉬운 처지에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확신한 거야. 이렇게 확신하자 그는 지혜로운 악마, 무서운 죽음과 파괴의 두려운 악마의 지시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받아들여 의식적으로 인간을 죽음과 파괴로 이끌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그들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아채지 못하게 함으로써 적어도 그동안만이라도 그 가련한 맹인들이 스스로 행복을 느끼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러한 기만이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거야. 그가 한평생 자기의 이상으로 열렬히 신봉해온 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이야. 자, 이래도 불행하지 않겠니?

 

  만약 그 더러운 행복만을 위해 권력을 갈망하는 군대의 우두머리로 단 한 사람이라도 이런 인물이 나타난다면 이런 인물 한 사람만으로도 비극을 낳기에 충분하지 않느냐 그 말이야. 뿐만 아니라 이런 인물이 단 한 사람이라도 우두머리가 된다면 로마의 사업, 그 군대도 예수회도 모조리 포함해서 로마의 사업에 대한 진실하고도 지도적인 고상한 이상을 낳기에 충분하지 않느냐 그 말이야. 나는 단언한다. 그리고 굳게 믿는다 ― 이와 같은 '유일한 인간'은 모든 운동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고. 어쩌면 로마의 추기경들 중에도 이런 종류의 '유일한 인간'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거야. 그리고 이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동맹 또는 비밀결사로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야. 이러한 비밀을 나약하고 불행한 인간으로부터 감추는 것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지. 이것은 반드시 존재해. 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돼."  (pp.429-430)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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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고 다시 읽어도 멋진 소설이다. 아니. 멋지단 말론 감히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하고 담대한 세계다. 어느 누구도 감히 악역이라 단정할 수 없는 인물들,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온갖 악들이 빚어내는 일상과 사건들. 유일하다시피 한 절대선이자 무결점의 알료샤가 무색의 인물 같아 보이기까지 할 지경이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정신 없이 빠져들어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개인적으론 이반이란 캐릭터를 가장 좋아했다.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이성으로 무장하며 아슬아슬 줄타기 하는 모습이 어딘지 위태로우면서도 시선이 갔다. 차가운 이성이 결국은 뜨거운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자기 나름의 책임감으로 무너지는 대목에선, 발 끝까지 저릿저릿 전율했던 것도 같다. 캐릭터가 워낙 강렬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탓에 얼핏 그닥 도드라지지 않는 듯 하지만, 소설의 이념적 방향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주옥 같은 말들이 너무나 많아 책 한 쪽을 접고 접고 접다가, 잔뜩 두꺼워지는 귀퉁이에 포기하고 텍스트 하나하나를 후루룩 삼키는 느낌으로 읽고 읽고 또 읽었던 작품. 이반과 알료샤의 <대심문관>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 신과 신앙, 무신과 불신, 종교와 희생과 모순을 총망라한 백미 중 백미.

 

 

 

  p.s  도스토옙스키의 무신론을 분석한 괜찮은 글. 가볍게 읽을 수 있다. 

http://hongbanjan.egloos.com/560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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