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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by 디어샬럿 2015. 1. 4.

 

 

 

  3~4년 전 읽고 정리해 둔 것. 대학 입학하고서 호기롭게 집어들고선 턱턱 막히는 독해 호흡에 한껏 좌절했던 풋내기 스물의 단상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첫 기억이다. 부작용이었던지, 이후 한동안은 철학을 미지의 세계처럼 여기게 된 적이 있었다. 다시 읽기까지 6년께 걸렸으니 모르긴 몰라도 두려움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별 것 아닌 단어들이 빚어내는 견고한 체계는 여전히 녹록잖지만, 실로 매력적인 세계다. 시간을 뛰어넘는 통찰에 감탄도 해 가며 밑줄도 긋고 책 귀퉁이도 열심히 접어올렸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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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과 행복

 

--  목적들은 명백히 여럿인 것으로 보이고, 우리는 이 목적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기도 하므로―예를 들어 부(富), 피리,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구들의 선택― 모든 목적이 다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최상의 좋음은 분명 완전한 어떤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하나만이 완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겠다.

 

--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haplos)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족성에 대한 고려로부터도 똑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 같다. 완전한 좋음은 자족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자족성’을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행복이 바로 그렇게 자족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어떤 것으로서,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이다.

 

 

 

2. 중용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지침

 

--  중간을 겨냥하는 사람은 먼저 그것에 더 대립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두 극단 가운데 하나는 더 잘못된 것이며 하나는 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간을 맞추는 것은 극도로 어려우므로, 이른바 ‘제2의 항해’에 따라 악덕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을 취해야만 할 것이다.

 

--  우리 자신들이 쉽게 기울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니까.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즐거움과 고통들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그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야만 한다. 사람들이 비틀어진 나무를 곧게 펴려고 할 때 하는 것처럼, 잘못을 범하는 것에서부터 멀리 떨어짐으로써 우리는 중간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용기와 고통

 

--  고통스러운 것들을 견뎌냄으로써 용감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런 까닭에 용기는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며, 용기가 칭찬받는 것은 정당하다. 즐거운 것들을 삼가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들을 견뎌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니까.

 

 

 

4. 수치

 

--  '수치(aidos)'를 하나의 탁월성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품성상태라기보다는 감정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수치는 나쁜 평판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으로 규정되며, 끔찍한 것들에 관한 두려움과 비슷한 것을 산출해 낸다.

 

--  수치는 어떤 조건 아래서는 훌륭한 것일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실제로 부끄러운 일을 한 경우라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즉 부끄러운 일을 한다는 조건은 탁월성과 관련해서는 맞지 않다(애초에 그럴 만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나쁜 것이고, 수치도 모른 채 부끄러운 짓을 행하는 것도 역시 나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을 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 정치적 정의와 자연적 정의

 

--  정치적 정의의 한 부분은 자연적인 것이며 다른 한 부분은 법적인 것, 혹은 관습적인 것이다. 자연적 정의는 사람들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어디에서나 동일한 힘을 가진다. 반면 법적 정의 혹은 관습적 정의는 애초부터 이러한 방식으로 규정되든 저러한 방식으로 규정되든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일단 제정된 연후에는 차이를 갖는 것이다.

 

--  규약과 이로움에 따라 정의로운 것들은 척도(metron)와 유사하다. (…) 자연적으로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정의로운 것들은 어디서나 동일하지는 않다. 정치체제 역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오직 하나의 정치체제만이 어디서든지 자연에 따라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하더라도.

 

 

 

6. 성격적 탁월성과 사유

 

--  사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지만 목적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사유는 그렇지 않다. 사실 바로 이 사유가 제작적 사유까지도 지배한다. 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 어떤 목적을 위해 제작하며, 제작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단적인 목적이 아니니까. (…) 잘 행위한다는 것은 목적이며, 욕구는 이 목적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합리적 선택이란 욕구적 지성이거나 사유적 욕구인 것이며, 인간이 바로 그러한 원리다.

 

 

 

7. 잘 숙고함

 

--  잘 숙고한다는 것은 유익함에 따른 올바름이자 마땅히 도달해야 할 것, 마땅히 해야 할 방식, 마땅히 해야 할 시간에 따른 올바름이다. 또 우리의 숙고는 단적으로 잘 숙고했을 수도 있고, 특정한 목적과 관련해서 잘 숙고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단적으로 잘 숙고했다는 것은 단적인 목적을 제대로 성취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잘 숙고했다는 것은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 따라서 만일 잘 숙고했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숙고를 잘한다는 것은 목적을 성취하는 데 유용한 것을 따르는 올바름일 것이고, 이에 대한 참된 파악이 바로 실천적 지혜이다.

 

 

 

8. 실천적 지혜와 성격적 탁월성

 

--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탁월성을 정의할 때면 그것이 어떤 품성상태인지, 어떤 대상들에 관련하는지를 이야기한 다음, 그것이 올바른 이성에 따른 품성상태라는 점을 덧붙인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약간 수정해야만 한다. 탁월성은 단순히 올바른 이성에 따른 품성상태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동반한 품성상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것들에 관련한 올바른 이성이란 다름 아닌 실천적 지혜이다.

 

 

 

9.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  많은 사람들은 명예를 좋아하는 탓에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아첨을 좋아한다. 아첨꾼은 열등한 친구이거나 열등한 척 가장하는 친구이며, 사랑받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사람이다.

 

  사랑받는 것은 존경받는 것에 가까워 보이며,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추구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명예를 그 자체로 선택하는 것 같지는 않고 우연히 그렇게 하는 것 같다. (…) 그러나 사랑받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을 준다. 그런 까닭에 사랑받는 것이 명예를 얻는 것보다 더 나아보이는 것이며, 친애도 그 자체로서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10. 친애와 정의

 

--  친애에도 더 강한 정도의 친애, 더 약한 정도의 친애가 있다. 정의로운 것들 역시 각각의 경우에 차이를 보인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어야 할 정의로운 일은 형제 사이에 있어야 할 정의로운 일과 같지 않으며 절친한 친우들 사이에 있어야 할 정의로운 일은 시민들 사이에 있어야 할 정의로운 일과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친애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정의한 행동 역시 이러한 친구들의 부류 중 각각에 있어 서로 다른 것이며, 부정의한 행동이 보다 가까운 친구들을 향한 것이라면 부정의는 더 커지게 된다.

 

--  모든 공통의 교제는 정치적인 공동체의 부분을 닮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서로 교제를 하는 것은 어떤 유익을 위해서이며 삶을 위해 필요한 어떤 것을 산출해내기 위해서이고, 정치적인 공동체 역시 어떤 유익을 목적으로 처음부터 함께 모여 지속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겨냥하는 것도 바로 이 유익이며, 사람들은 또 정의를 공통의 이익이라고 하는 것이다.

 

 

 

11.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친애

 

--  우월성에 따른 친애에서도 분쟁이 발생한다. 이것은 각자가 상대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친애는 해체되고 만다. 더 우월한 자는 좋은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친애로부터 나오는 일들이 실제적 가치에 따라 차등 있게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친애가 아니라 공적 자선행위가 된다고들 하니까. 그러나 곤궁한 사람들, 열등한 사람들은 그 반대로 생각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좋은 친구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  우월한 편에는 더 많은 명예를 나누어 주고, 곤궁한 편에는 더 많은 이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탁월성과 선행에 맞는 선물은 명예이며, 곤궁에 맞는 도움은 이득이기 때문이다.

 

 

 

12. 활동으로서의 즐거움

 

--  모든 사람들은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움을 욕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일종의 활동이며, 각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능력]들을 가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활동을 발휘한다. (…) 즐거움은 그 활동들을 완성시키고 따라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 또한 완성시킨다. 따라서 사람들이 즐거움도 추구한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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