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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음악

2015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by 디어샬럿 2015. 1. 4.

 

 

 

 

 

 

 

  익숙한 색감과 부감으로 가득한 공연장을 카메라가 구석구석 훑는다. 렌즈의 동선을 따라 닿은 시선의 종착엔 늘 그랬듯 악단이 있다. 바이올린과 첼로와 플룻과 하프 따위를 든 오케스트라. 빈틈 없는 건물의 위압감이랄까, 고풍스러운 장식의 우아함이랄까. 무엇 하나로 특정하기 힘든 분위기가, 가까워지는 무대의 무게만큼 묵직하게 다가온다. 카메라 앵글을 차 오르는 화면의 틈새로 소리도 조금씩 들어찬다. 불협화음이다. 본 연주에 들어가기 전 음을 점검하는 잠깐의 시간. 저마다 징징대고 낑낑대는 음들로서야 비로소, 현장과 시간이 살갗으로 닿아오는 느낌이다. 이제 시작이다. 이 찰나마저도, 여기서는 연주다.

 

  빈 필하모닉은 올해도 어김없었다. 1월 1일 정오,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선 여느 때처럼 신년음악회가 열렸다. 중계방송을 놓친 대신 세상이 좋아 유튜브 고화질로 풀버전을 감상했다. 1941년 처음 시작한 이 행사는 어느덧 2015년을 기해 75회째다. '신년'이라는 타이틀처럼 꿈이 잔뜩 부풀어오를 듯 밝은 선곡과 연주가 특징. 자연히 템포가 빠른 왈츠, 폴카, 갈로프 등으로 구성된다. 덕분에 단골 작곡가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2세, 요제프 및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등 전 집안이 왈츠와 폴카에 두각을 드러냈던 슈트라우스 패밀리다. '슈트라우스 가족모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도는 게 무리는 아닌 셈이다.

 

 

01. Franz von Suppé : Overture <Ein Morgen, ein Mittag, ein Abend in Wien> (빈의 아침, 낮, 밤 서곡)
02. Johann Strauss, Jr. : Marchen aus dem orient. Walzer, op.444 (동양 왈츠에서의 동화)
03. Josef Strauss : Wiener Leben. Polka française, op. 218 (빈에서의 생활)
04. Eduard Strauss : Wo man lacht und lebt. Polka schnell, op. 108 (웃음과 삶이 있는 세상)
05. Josef Strauss : Dorfschwalben aus Österreich. Walzer, op. 164 (오스트리아 마을제비)
06. Johann Strauss, Jr. : Vom Donaustrande. Polka schnell, op. 356 (도나우 강변에서)

 

- intermission -

 

07. Johann Strauss, Jr. : Perpetuum mobile. Musikalischer Scherz, op. 257 (음악적 농담)
08.                                Accelerationen. Walzer, op.234 (가속도 왈츠)
09.                                Elektro-magnetische Polka, op. 110 (전자기 폴카)
10. Eduard Strauss : Mit Dampf. Polka schnell, op. 70 (증기 왈츠)
11. Johann Strauss, Jr. : An der Elbe. Walzer, op. 477 (엘베에서)
12. Johann Strauss : Annen-Polka [Beliebte Annen-Polka], op. 137  (아넨 폴카)
13. Hans Christian Lumbye : Champagner-Galopp, op. 14  (한스 크리스티안 룸뷔에 : 샴페인 갈로프)
14. Johann Strauss, Jr. : Studenten-Polka. Polka francaise, op. 263 (학생 폴카)
15. Johann Strauss : Freiheits-Marsch, op. 226 (자유의 행진)
16. Johann Strauss, Jr. : Wein, Weib und Gesang. Walzer, op. 333 (와인, 여자 그리고 노래)
17. Eduard Strauss : Mit Chic. Polka schnell, op. 221 (세련되게 폴카)

 

 

  이맘때의 황금홀은 전 세계에서 공수한 꽃으로 한껏 치장한다. 가뜩이나 황금과 명화, 섬세한 조각들이 가득한 공연장은 그야말로 오색찬란해진다. 악기의 호흡 사이로 진한 꽃향기가 잔뜩 배어들 것 같은 공간. 색감은 웅장하면서도 자연스럽다. 퍼져오르는 선율이 색색의 항연에 흠뻑 물들 듯 하다. 그 압도적인 화려함이 공연 내내 보는 이를 황홀하게 한다. 꽃들은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이 가져갈 수 있다. 근 70년간 이어온 전통이란다.

 

  선곡과 무대연출이 크게 다르지 않은 반면 매년 바뀌는 것이 있으니, 바로 지휘자다. 빈 필하모닉은 1933년 이후 정규 지휘자 없이 해마다 다른 지휘자를 초빙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신년음악회도 이 룰을 피해가지 않는다. 이 덕에 매년 신년음악회의 지휘자 여부를 두고 세간의 관심이 모아진다. 빈 신년음악회 지휘석은 무티, 아르농쿠르, 얀손스 등 현존 최고의 지휘자들은 물론 카라얀, 아바도, 클라이버 같은 전설들까지 한 번쯤은 거쳐갔을 정도로 명예로운 자리다. 때문에 지휘자 자리는 현역 최고의 이들로 후보를 정하며, 단원의 의견과 그간의 활약을 종합해 심사숙고 후 결정된다.

 

 

 

  올해는 주빈 메타가 지휘를 맡았다. 이번으로 주빈 메타는 신년음악회만 다섯 번째. 상임지휘는 공석이었을지언정 사실상 정기적으로 신년음악회를 맡았던 지휘자는 존재했던 1987년까지를 제외하면, 단일 지휘자로서는 최다 기록이다. 메타의 지휘는 색이 분명하고 음감이 풍성한 편. 신년음악회와 잘 어울린다. 신년음악회답게 소소한 관객 서비스도 빼놓지 않는다. 올해는 페르페투움 모빌 <음악적 농담>에서 주빈 메타가 즉흥 대사(!)로 곡을 끝맺었고, <샴페인 갈로프>에서 연주 후반부에 샴페인을 들며 신년을 축하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앵콜에 이르면 클래식 공연으로선 드물게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한다. 앵콜곡은 늘 그랬듯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에 이은 <라데츠키 행진곡>. 2시간 여의 공연 끝에 이들을 듣노라면, 새해라는 대단원을 곡들만큼이나 화창하게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곳곳에 넘치는 위트와 우아하면서도 해사한 선율. 정말이지 언제나 좋다, 이 음악들은.

 

 

 

 

 

 

 

  가장 좋아하는 신년음악회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때의 공연이다. 클라이버는 1989년과 1992년, 두 번에 걸쳐 지휘를 맡았다. 신년음악회 특유의 밝고 경쾌한 음악이 클라이버의 음악 세계와 참 잘 맞는다. 한층 원숙해지고 여유로워진 노년의 클라이버가 빚어내는 알록달록한 음악들. 노신이 된 그는 "음악과 인생은 늘 즐거워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한다. 클라이버 식의 '즐거움'에 한껏 고무되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상이 제격이다. 각각 1989년과 1992년의 음악회. 여느 지휘자와 확실히 다른 감각적인 템포와 풍성한 음색이 백미다. 1시간 30분이 짧아 입맛을 다시게 된다.

 

 

 

 

  클라이버의 1989년 빈 신년음악회. <라데츠키 행진곡> 부분인데, 올해 주빈 메타의 같은 곡보다 훨씬 빠른 템포를 느낄 수 있다. 메타의 라데츠키는 박자가 처지는 바람에 빈 신년 앵콜 특유의 발랄한 마무리 느낌이 덜하다. 템포에 생기를 부여하는 건 역시 클라이버를 따를 사람이 없다. 음악을 '행복하게' 연주하는 사람을 단 한 명 꼽노라면, 단연 클라이버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서곡. 역시 클라이버가 지휘했다. 1989년 빈 필 신년음악회 버전을 가장 좋아하는데 유튜브에 클립이 없다. 영상은 1986년에 바이에른 주립 교향악단과 함께한 일본 공연이다. 이 악단과는 오르페오에서 출시한 베토벤 교향곡 녹음본을 남기기도 했다. 1989년 빈 필 영상을 보면, 클라이버가 이 곡에서 춤을 추는 듯 양 팔을 나긋하게 흔들며 지휘한다. 맑은 얼굴로, 진심을 다해 음악을 즐기는 모습에서 말간 빛이 날 지경이다. 보는 사람마저 꿈에 들 것 같은 기분 좋은 지휘. 들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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