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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독설의 팡세>, 에밀 시오랑

by 디어샬럿 2014. 8. 14.

 

 

 

 

  "신념이 확고한 인간에게는 문체가 필요없다. 말을 잘하려고 걱정하는 것은 신념 속에 잠들 수 없는 인간이나 갖고 있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기댈 수 있는 굳건한 것이 없으므로, 그들은 현실의 겉치레에 불과한 언어에 매달린다. 그러나 신념이 확고한 인간들은 현실의 겉치레를 무시하고 자발적인 언어 속에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다."

 

 

-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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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설의 팡세>는 생각날 때마다 읽는다. 단문들로 구성된, 이를테면 잡문집 같은 거다. 잡문집이라기엔 말이 품은 독이 꽤 세다. 으레 '문집'이랄 게 주는 알록달록함과는 거리가 멀다. 독설집이라고 해야 더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것도 허무와 회의에 대한 옹호의 첨병 역할을 자처하고, 세상의 모든 통념을 후벼파기로 단단히 작정한 독설이다. 유려한 문장까지 겹쳐지니, 거의 반박 불가 수준이다. 읽다보면 독설에도 급이 있구나 싶다. 

 

  절판된 지가 오래라 도서관에서 필사하며 읽었다. 문학동네에서 전자책으로 출간했다지만 굳이 사진 않았다. 덕문에 웬만한 문장은, 정확하겐 아니라도 머릿속에 콕 박혀 있다. 음악 부분만 제외하면 거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음악은 기호의 문제 때문이다. 내겐 영원한 우상인 베토벤을, 시오랑은 극도로 싫어했다. 쇼팽과 더불어 음악을 분풀이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주범으로 봤다. 그의 음악적 지향점은 바흐였다. 완고한 바흐주의자랄까. 그러면서도 "음악은 눈물의 미립자"라 말했다. 아무래도 형용모순이다. 그쪽만은 동의하지 않지만, 다른 건 좋다. 어쨌든 신선하다. 처한 상황에 따라 와 닿는 문장이 그때그때 바뀌는 것도 책의 묘미라면 묘미다. 

 

  오랜만에 펼친 날선 팡세들에서 새롭게 울리는 문장을 만났다. 수식 가득한 독설들 사이에서도 눈이 번뜩 뜨였다. 물론 단단한 앎을 기반으로 한 문체의 유무라는 것 정도야 안다. 그런데도 영문도 모르게 찔렸다. 외려 이도저도 아닌 나 같은 이들을 잔뜩 비꼬는 것 같은 건, 내가 너무 꼬아선가? 어쨌든 졸지에 신념왕이 됐다. 제멋대로 뛰어다니고 좌충우돌 굴러다니는 문장들. 아주 그냥 투철한 신념의 용사가 따로 없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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