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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소비사회 ‘성실’과 ‘관용’의 이면

by 디어샬럿 2023. 10. 16.

물질적 재화나 노동력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것들과 같은 논리에 따라서 생산되고 소비되기 위해서 관계는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통적인 인습이나 사회적 의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일반적이 된 기능적 관계와는 양립할 수 없는 예의범절이나 에티켓의 종언이다. 그러나 예의범절이 무너졌다고 해서 곧 자발적인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 그 자체는 산업적 생산과 유행의 체계에 지배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성의 반대물이기 때문에 자발성에 관한 모든 기호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성실함의 신앙'에 대한 묘사에서 리스먼이 지적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미 언급한 '따뜻함'과 '배려'에의 맹신이나 부재의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기호와 강제적 의례에의 신앙과 같은 종류의 신앙이다.

(...)

친밀한 교제, '직접 인터뷰', 어떻게 해서든지 '대화'를 성립시키고자 하는 강제 등에 붙어다니는 것은 사실은 잃어버린 성실함의 망령이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소멸하였다. (...) 보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을 고찰해보자. '양심적인 가격', 스포츠의 세계뿐만이 아닌 연애나 정치에서의 페어 플레이, '높으신 분들'의 솔직함, 영화 등의 스타들의 '적나라한' 고백, 망원렌즈로 포착한 각국 왕실의 일상생활 등에 대한 사람들의 강박관념적인 관심의 배후에는, 즉 성실함에의 과도한 요구(그것은 현대건축에서 재료에 대한 수요와 비슷하다) 속에는 문화변용을 받은 계급의 전통적 문화와 의레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발이 아마도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문화와 의례는 어떤 형태를 취하더라도 항상 사회적 거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실함'의 신앙이라고 하는 대중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강박관념은 문화적으로 영락한 사람들의 계급적 의사표시이며, 기호에 의해 속았고 조작당해왔다는 강박관념(사실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혹은 고상하며 격식을 중시하는 문화에 대한 공포 또는 거부('꾸밈없는' 문화나 직접적 커뮤니케이션의 신화 속으로 떠밀려서 들어가고 있지만)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산업주의적 성실함의 문화에서 소비되는 것은 역시 성실함의 기호이다. 이러한 성실함은 존재와 외관의 관계처럼 파렴치함이나 위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능적 관계의 장에서는, 파렴치함과 성실함이 기호의 조작 속에서 어떠한 모순도 없이 교체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실함은 선이며 인위적인 것은 악이라고 하는 도덕적 도식은 항상 작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현실적인 특질을 함의하지 않고 성실함의 기호와 인위적인 것의 기호 사이의 차이만을 함의하는 것에 불과하다.

'관용'의 문제(자유주의, 방임주의, '관대한 사회' 등)도 성실함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된다. 오늘날에는 이전의 불구대천의 적끼리 이야기하고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였던 이데올로기들  사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모든 수준에서 일종의 평화공존이 정착하고 세상 풍조도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 이러한 사실은 인간관계의 '인도주의적인' 진보라든가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든가 하는 실없는 소리를 뜻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사태는 이데올로기, 여론, 미덕과 악덕 등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미 교확과 소비의 용구에 불과하며 모든 모순된 사항이 기호의 조합 속에서 등가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관용은 더 이상 심리적 특성도 미덕도 아니며, 체계 그 자체의 하나의 양태이다. (...)

관용이 윤리적인 의미에서 암시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기능/기호, 사물/기호, 존재/기호, 관계/기호, 이념/기호 등의 일반적 상대성이다. 사실 성실함이라고 하더라도 속임수와 대비되는 성실함은 아닌 것처럼, 관용이라고 하더라도 광신과 대비되는 관용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관용 자체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체계가 변화하였으며 기능적 융통성의 시대가 왔다는 것뿐이다.


-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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