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력' 담론은 인류사를 종횡으로 관통해 왔다. 높은 생산력을 향한 욕망은 시간이 더해지며 학습되고 전승됐다. 특히 자본이 본격적으로 인간을 장악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부터, 생산력은 자본 특유의 성격에 타협하며 지극히 물리적이고 수치적인 성과 위주의 개념으로 전용됐다. 오늘날 통용되는 생산력이란 적은 비용으로 많은 재화를 만들어내는 힘이나 마찬가지다. 패러다임 내지는 헤게모니 이상의 진리이자 금언이래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200여 년에 걸친 이 ‘당연함’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ESG의 등장이다.
ESG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건 2~3년 전이다. 유수의 대기업 리포트에 당시로선 생경했던 이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코로나19로 화려하게 ‘주류 생산사회’에 등장했다. 지극히도 인간 친화적이고 사회 최우선적인 테제로 성과 제일주의 시류에 작은 반기를 들었다. 책 제목처럼 혁명이라기엔 아직은 어딘지 객쩍지만, 분명 의미 있는 변화다. 실제로 ESG의 근간 개념은 얼핏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라는 지대와 성격이 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재무제표상의 ‘실적’ 혹은 기업평가의 ‘성과’란 높은 수익이나 괄목할 만한 흑자를 일컫는다. 기존의 자본 메커니즘에서 재무성과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인간과 사회를 품겠다며 나선 ESG는, 발칙하게도(!) 이 잠언과도 같은 고밀도의 믿음에 의문을 던진다.
“수익을 향한 맹목과도 같은 자본 메커니즘적 믿음이 기업을 얼마나 지속시켰나? 더 나아가, 지구와 인류를 얼마나 더 존속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은 이 의문에 불을 지폈다.
ESG 개념의 골자를 풀어쓰자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인간은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보존할 의무가 있으므로, 모든 기업의 사업과 인간의 행위에서 환경은 최우선 고려사항이다. ▲빈곤과 차별 등 지구 구성원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고, 높은 사회적 감수성으로 말미암은 사회 책임 의식과 행동이 앞서야 한다. ▲인간-사회-지구와 상생하는 경제 및 산업 체계를 만드는 의무가 기업과 국가에 있으며, 이를 위해 경영의 투명성과 조직의 유연성을 높인 건강한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말하자면 ‘직선 주로’라 할 수 있는 기존의 발전 논리를 타파하는, 상호 선순환 기반의 ‘지속가능성’이 ESG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ESG가 생산력을 배제하고 있는가. 아니다. 외려 생산력의 증대라는 자본사회의 과제를 조금 더 종합적이고 똑똑한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ESG가 종전까지 사회적 가치를 내건 담론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생산을 위한 모든 활동의 비재무적 가치를 재무 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는 매력이 그것. 사실 재무제표는 방대하고 다양한 기업의 활동 중에서도 상당히 제한적인 부분에 국한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 계량지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각보다 크고 많은 비재무적인 노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는데, 기존의 경제성과 지표에선 이런 영역이 철저히 논외로 취급된다. 기존 자본 메커니즘 하에서 드러날 방법이 없었던 노력과 정책들이, ESG의 등장으로 좀 더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수치로써 빛을 발할 수 있게 됐다. 기업과 국가 입장에서는 적잖이 큰 의미다.
책은 ESG 선도 정책으로 최근 입소문을 탄 ‘핫’한 몇몇 기업들의 사례를 강조하며 이것이 경영의 메가 트렌드임을 방증하려 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된 정책 특유의 생동감과 열기를 품은 기업 사례로만 갈음될 뿐인 개념이라면, ESG 역시 어느 시대에 잠시 스친 구호에 그칠 뿐일 터다. 이 ‘혁명’을 맞이하는 우리 개개인의 고민은 조금 더 차분하고 냉철한 곳에 가 닿아야 한다. ESG가 경영 모토를 넘어 개별자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시대정신을 넘어 통시적 선(善)이 되기 위해 우리는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ESG가 선언적이고 일시적인 흐름에 그치지 않으려면 여기서 어떤 단계가 더 필요한가. 생산력을 향한 유구하고 거대한 담론에 감히 도전장을 내민 이 거스를 수 없는 ESG 혁명 앞에서, 더 좋은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해 주어진 과제들을 함께 고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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