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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관능적인 혹은 원시적인 폭력 : 한강, <채식주의자>

by 디어샬럿 2017. 2. 22.

 

처음 한강이란 작가에 관심을 가진 게 2년 전쯤이었던가. 교보문고 시집 코너에서 우연히 그녀의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아는 한강은 소설가인데 언제 시를 썼지 싶어 표지를 들쳤더니, 그런 의문은 넘치게 받았다는 듯 이력 제일 첫 줄에 기입돼 있었다, 1993년 시로 등단했다고. 그 길로 사서 읽은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가 한강과의 첫 조우였다. 너끈한 시간을 들여 겨우 읽은 시들엔 껍질이 벗겨진 언어들이 이지러져 있었다. 끝없이 갈아지고 빻아진 언어가 고요히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그것은 어떤 아픔이기 이전에, 언어를 향한 치열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 읽은 것이 <희랍어 시간>이었을 것이다. 언어와 세계를 집어삼키는 각자의 어둠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앞에서 소설 속 언어들은 치열하게 발버둥치고 있었다.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한 문장들이었다. 200쪽이 채 안 되는 소설이었음에도 한 줄 한 줄 맞닥뜨릴 때마다 몇 번이나 서성여야 했다. 생각을 겹겹이 두르게 하는 문장들이었다.

그 다음 읽은 것이 <채식주의자>였다. 2007년에 단행본으로 엮인 책이니, 내가 읽은 때와는 8년 정도의 시차가 난다. 소설은 직전에 읽은 작품에 비해 훨씬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소재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와서는 문득 생각한다. 작가의 언어에 대한 고민이 점점 깊어지고 있구나 하고. 그럼에도 <채식주의자>에서 이미, 언어들은 충분히 고통과 고행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살풍경한 문장들, 검붉게 돋아나는 말들, 밤과 낮의 꽃으로 피어나고 점멸하는 열망들,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려는 역설들, 사랑 혹은 욕망의 이름을 감히 덧쓴 내밀한 폭력들, 죽음의 문턱을 문질러대는 좌절들... 어느 것 하나 쉬이 놔두질 않고서 몰아부치는 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듬해, 작가는 이 소설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언젠가는 이 책에 대해 남겨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책이 뇌리에 끈적거렸다. 소재와 플롯이 주는 충격도 충격이지만, 이야기를 향해 달려나가는 방식이, 그 소설에 감도는 미끈미끈한 감각들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총 세 편의 소설을 연작 형식으로 배치한 책은, 이를테면 서서히 존재를 드러내는 마수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1편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유독 귀찮음이 밴 듯한 문장을 구사한다. 주인공 '영혜'의 남편이자 '정서방'이라 불리는 남자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뜬금없이 채식주의를 선포한 후 점차로 이상해지는 아내의 일화를 그려낸다. 그 무심함은 어딘지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남편의 무던한 어투는 그러나 반전을 맞는다. 마치 손톱을 숨기고 있을 듯했던 손에서 냉큼 갈퀴가 튀어나오는 것만 같은 충격이, 자신의 손목을 긋는 영혜의 모습으로 독자 앞에 드러난다. 병원 대기의자에 앉은 영혜는 상의를 탈의한 채 새의 생피를 입에 가득 묻히며 남편을 향해 웃는다. 1부가 그렇게 끝난다.

2부 <몽고반점>에서 갈퀴손은 촉수가 되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다. 영혜는 기어이 이혼을 당하고야 말고, 몇 달 간의 정신병동 생활을 거친다. 그녀는 어딘지 영혼이 통째로 빠져나간 듯한 모습으로 시간의 표면을 부유할 뿐이다. 그러나 화자인 형부,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장서방'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걸로 기억되는 남자의 등장으로 나른한 일상은 급전직하한다. 언니 '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들은 후로, 그는 처제인 영혜에게 비정상적인 욕구를 느낀다. 그는 처제의 나신에 꽃을 가득 그린 채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정성스레 핥듯이 비디오에 담아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급기야는 자기 자신도 꽃이 잔뜩 그려진 몸으로 영혜와 성교를 맺고, 자기 예술세계의 성취라 자위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욕망을 분출한다. 우연히 영혜의 집을 찾은 인혜는 두 '꽃'의 적나라한 교접이 담긴 영상을 본다. 탁자 위에 한동안 엎어진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이윽고 정신병원 인부들이 집을 찾는다.

전편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3편은 상대적으로 숨을 고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오롯이 인물들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면, <나무 불꽃> 편이야말로 허망의 끝을 달려가는 이야기래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정신병원에 입원해버린 영혜는 이젠 아예 나무가 되겠다고 말한다. 기행을 일삼으며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는 그녀에겐 생명의 빛조차 멀어지고 있다. 인혜는 그런 영혜를 보며 과거에 스쳤던 나무들과 숨겨둔 상처를 떠올린다. 자매의 비밀 아닌 비밀이 드러나는 이 지점에서, 독자는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는 영혜의 끈덕진 고집이 솟아나온 근원을 마주한다. 그녀를 이해할 듯도 하지만 온전히 이해하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온 것이 아닌가 싶은 지점에서, 영혜는 최후의 광기를 드러낸다. 구급차는 영혜를 싣고 산길을 달리고, 보호자로 옆에 앉은 인혜는 나무숲을 노려볼 뿐이다.

 

단 한 줌의 폭력조차도

꿈을 꿨다고 했다. 웅덩이가 질 정도로 온통 피가 가득한데, 그 속에서 또 피로 짓이겨진 얼굴이 비치는 꿈을 꾼다고. 그 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그 모든 원인이 육식에 있다고 자체적 판단을 내린 후, 그녀는 돌연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녀에게 채식이란 육식으로 대변되는 온갖 폭력들을 있는 힘껏 거부하려는 몸짓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육식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 누구보다 육식이 친숙한 환경에서 자라왔다. 영혜의 친정은 비정상적으로 고기 요리를 좋아하는 집안이었다. 그녀 역시 가풍을 따라 평범하게 고기를 먹어오던 사람이다. 말하자면 육식은 그녀의 정체성의 일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육식 거부는, 그래서 일면 공포가 느껴질 정도로 극단적이다. 심지어 (남편의 눈엔 전혀 상관관계가 없어보이지만) 브래지어마저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른다. 모든 형태의 공격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한 탈피를 꿈꾸며.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영혜의 극단적인 선택의 이유가 처음 윤곽을 드러내는 지점은 가족모임이다. 그녀의 입에 억지로 고기 요리를 넣으려다 실패한 아버지는 영혜의 뺨을 세차게 두 번 때린다. 그녀는 식구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다, 과도로 손목을 긋는다. 복선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한 이 장면이 구체적 형상을 띠는 건 3부에 이른 인혜의 독백에서다. 영혜는 삼남매 중 가장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베트콩을 도륙한 사실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며 떠벌리는 월남전 참전 군인이었다. 아버지는 폭력을 마치 대화처럼 쓰는 사람이었고, 영혜는 남매 중 가장 압도적인 횟수로 아버지의 '대화'의 상대가 되어야 했다. 언니인 인혜나 남동생인 영호완 달리 나이가 차서도 아버지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야 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것은 본의는 아닌, 어릴 적의 기억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강이를 문 개가 아버지의 가학을 견디며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개는 끝끝내 두 눈을 뜬 채 그녀를 응시하며 죽어갔다.

어떤 것에도 의도는 없다. 차라리 악의 같은 것이 있었던 폭력이었다면 나았을 지도 모른다. 미워하고 증오할 상대라도 명확하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폭력에도, 영혜 자신이 개에게 저지르고야 만 폭력에도 뚜렷한 악의는 없었다. 아버지는 단지 딸을 대하는 방식을 몰랐을 뿐이다. 오륜지정으로, 가정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아버지의 폭력에는 미움 같은 것이 없다. 영혜가 아버지를 매개로 개에게 가한 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단지 사랑하는 딸의 정강이를 문 개를 혼내줄 요량이었다. 그 방법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고 잔혹하긴 했지만. 

그러나 반대로 이 모든 게 문제였다. 악의가 없는 폭력이었기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또렷하게 설명하지도 못한 채, 그저 꿈이 너무나 무섭다는 말을 뇌까리며 육식을 거부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맹목적 결정의 근원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하게 되는 건 <몽고반점>의 끄트머리 즈음이다. 자신의 깊은 뱃속에서 오래토록 숨어 있던 모든 폭력의 기억들을, 그녀는 기어이 인식한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p.143)

 

꽃술과 꽃술이 닿는 순간, 인간은 사라졌다

소설에서 가장 강력한 충격을 주는 <몽고반점>의 중심인물은 단연 형부다. 채식주의자가 되고서, 어떤 형태가 됐든 가장 먼저 그녀를 '인정'한 건 형부였다. 사실상 형부는 적어도 영혜의 전남편보다는 그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가족들 중, 아니 타인들 중에선 가장 먼저 영혜의 본성을 알아챈 것도 형부란 인물이다.

그녀는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추운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큼 단단한 고독을 음영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p.105)

그러나 그것은 '인간 영혜'에 대한 존중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자신의 예술적 커리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실은 수많은 비(非)의 영역을 오가는 비뚤어진 욕망이 공고하게 응축된 것이었다. 책의 맨 뒤에 실린 허윤진 평론가의 해설엔 형부의 영혜에 대한 욕망도 일종의 사랑이라 씌어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닌 이유는 꽤 명백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열망은 영혜를 우선으로 한 게 아니었다. 형부 자신이 변론처럼 주장하듯, 처음엔 예술 혹은 근본적 순수에 대한 병적 호기심으로 시작된 것이 그 '사랑'이란 것이었다. 관심의 계기 역시 엉덩이에 푸르스름하게 남은 몽고반점이며, 이마저도 그에겐 예술적 영감에 그치지 않는다. 그에게서 영혜란 단순히 예술의 근원이자, 오염을 거부하는 완고한 순수를 향한 파멸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인격체로서의 영혜를 향한 사랑이라곤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사랑이야말로 아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주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글쎄, 나는 이런 것에 결코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형부의 그것은 관능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의 또 다른 폭력이다. 그건 무방비 상태의 영혜를 향한 폭력적 열망이었다. 영혜가 그와의 성교 이후 나무가 되겠다고 선언한 지점을 짚어보면 더욱 그렇다. 빈틈없이 꽃을 그려넣은 두 나체의 교접은 일종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전의 영혜란 단지 과격한 방식으로 고기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였다. 즉 본인이 인간이라는 자각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영혜 스스로에겐 그것이 인간 존재로서의 마지막 가능성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은 형부와 몸을 섞은 후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식물이라도 받아들이는 인간이길 원했던 영혜의 작은 욕심에, 형부는 지극히 동물적인 욕망으로 화답했다. 관계의 절정에 이르러 영혜가 "그만"이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단순히 성적 열락으로만 해석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그 후 영혜는 채식조차도 거부하고, 물만 마시고 햇볕만 쬐며 물구나무를 서는 둥 하다 나무가 되겠다 한다. 모를 일이다, 기어코 사랑이라 볼 것이 있다면, 온몸을 뒤덮은 형부의 꽃이 그녀 스스로 꽃을 피우는 나무라 여기게 한 단초였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꽃술이 맞닿은 후, 최후의 '인간'은 완전히 영혜를 떠나버렸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동물과 육식과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는 아우성이다.

 

"너만 아팠던 게 아니야",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고통

인혜는 앞의 두 편에서 철저히 타자 혹은 방관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녀가 내면을 터놓기 시작하며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하는 건 막편 <나무 불꽃>에서다. 영혜가 극단적인 방법으로 인간적 삶을 거부했다면, 언니 인혜는 "나는 삶을 단지 견뎌온 것뿐"이란 생각을 하며 언제부턴가 소극적으로 삶을 회피해 왔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가만히 선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안나 카레니나처럼.

단지 사니까 살 뿐이라는 그녀의 생각이 더욱 짙어지는 건, 운명의 장난처럼 역시 어느 밤을 계기로 한다. 영혜의 형부이자 그녀의 남편과의 '형식적' 교접 이후다. 하필 그날은 자궁의 폴립을 뗀 때였고, <몽고반점>에선 남편의 목소리로 단 한 줄에 그치고 만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섹스 이후 그녀는 한층 강하게 자기 생의 무력을 직시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려 한 적도 있었다. 깜깜한 밤을 업은 나무들이 무서웠고, 그때만 해도 아직 모빌을 갖고 놀아야 했을 정도로 어렸던 아들이 생각났던 것이 영혜와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녀 역시 폭력의 희생자였다. 영혜와 영호가 충분히 자라기 전까지 아버지의 폭력을 감당한 건 오롯이 인혜였다. 영혜가 그 역할을 이어받은 직후, 인혜는 영혜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폭력의 사슬에서 도망쳤다. 인혜에겐 그래서 영혜를 향한 부채가 있다. 아버지의 폭력이 영혜에게로 옮아가면서 비겁하게 자신만 빠져나왔다는 마음. 그러나 폭력의 그림자는 끝내 인혜의 발목에 들러붙었다. 비겁함을 생존의 한 방식으로 채택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은 여태껏 살아온 것이 아님을 자각한 것이다. 영혜에게 이상징후가 포착되고 난 후부터다.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pp.191-192)

그러나 한편으로 인혜는 영혜가 못 견디게 증오스럽다. 자신의 남편과의 일 때문이 아니다. 그건 어느새 인혜의 인식세계를 벗어나 있다. 단지 그녀는 언제든 그리고 자유롭게 '죽음'에 다가갈 수 있는 영혜가 부럽다. 자의적으로 사회와 격리되고 인간이길 저버린 영혜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다. 인혜에겐 버려야 할 것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밝은 성품 덕에 그녀의 곁엔 사람이 많았고, 지켜야 할 가정과 아이가 있었다. 사회적인 것들에 얽매여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는 인혜에게, 영혜는 "은밀한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영혜는 자신의 고통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모두의 걱정과 불안과 체념을 받는다. 그러나 인혜는 고통을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다. 폭력으로부터 행한 최초의 도피는 비겁하지만 절박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사회로부터의 또 한 번의 도피가 용납되지 않았다. 인혜에게는 두 번째의 도피 역시 절박했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동생의 고통을 외면했던 대가인 것이다, 그녀는 가지를 세차게 흔드는 나무숲을 보며 직감한다.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p.173)

* * *

소설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여러 갈래로 읽어낼 수 있다. 단, 아주 지독한 고통과 기이한 욕망의 흔적이 끈끈하게 묻어난다는 점만은 변함이 없다.

다만 나는 생각할 뿐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렇게까지 도망치고 싶어했던 영혜의 고통을. 그녀의 생애를 켜켜이 덧씌웠던 습자지 같은 폭력의 흔적들을. 너무 얇고 너무 흐려서, 알아챌 수가 없어 이유도 모르고 참아내야 했던 잔인함의 기록들을. 스스로를 극한으로 밀어넣으며 나무가 되고자 했던 철저하고도 처절한 욕망을. 그리고 영혜를 통해 얻어내고 싶었던 어떤 이들의 농밀하고 광기 어린 집착을. 그녀가 그렇게까지 나무가 되고 싶어한 이유를, 혹은 비뚤어진 욕망의 형태를, 허윤진 평론가의 말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해석엔 정말로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 등 외적인 조건에 자신을 맡긴 채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이 사실은 주변의 생태계를 포괄하는 역동적인 체계라는 점을 기억하자. 식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그것은 때로 냉정한 광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욕망에 달아오른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과 영혜를 식물의 형상으로 구성한 결과가 지독한 동물적 욕망으로 낙착된 것은 어쩌면 예고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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