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결국 무엇인가? 대략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문서철인가? 역사가 혹시라도 세르반도 수사가 멕시코산 용설란을 발견했을 때의 중요한 순간이나, 에레디아가 자기 영혼의 절망 앞에 사랑하는 야자나무 숲을 보지 못했을 때의 감정을 기록하는가? 충동, 동기, 인간에게 밀려드는 비밀스러운 생각들은 등장하지 않고 역사에 의해 수거되어 등장할 수도 없다. 이것을 외과의조차도 고통받는 환자의 아픈 감정을 절대 포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전쟁이 일어난 날짜나 전쟁을 빛낸 사망자, 즉 명확한 것만을 기록한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방대한 책은 순간적인 것만을 요약한다(그리고 충분하다), 원인이 아닌 영향을. 그래서 나는 역사보다는 시간에서 찾는다, 그 영원하고 다양한 시간에서. 인간은 그 비유다. 왜냐하면 비록 외견상 역사를 수정하려 시도하고 어떤 이들에 의해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역사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시간을 영원에서의 일직선적인 것으로 본다. 그렇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떤 증거를 사용하는가? 1500년은 1700년보다 앞서고, 트로이 전쟁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참수형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라는 기본적 논리로? 마치 시간이 무언가를 위해서 그러한 표시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마치 시간이 연대기와 전개에 대해 알고 있는 듯이, 마치 시간이 전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을 순서대로 나열하려는 인간의 천진함, 점진적으로 ‘진보주의적’이기까지 한 의도로 배열하려고 하는 것조차 시간은 거부한다. 어떻게 영원한 것을 정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공포스러운 이 일을 단념하지 안ㄹ는다. 그래서 계속 고사본, 날짜와 축일 같은 것에 많은 중점을 둔다. 우리가 어떤 시간에서건 진실되고 비통한 인간을 발견할 때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현재성, 즉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그가 존재했느냐 안 했느냐와 상관없이 분노와 사랑으로 인해 영원하며, 그리스도는 역사가 기록하든 안 하든 그의 실현하기 힘든 철학으로 영원하다. 그 비유, 그 이미지는 영원에 속한다.
영원한 것은 서열이 있거나 명백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배열된 것이나 사진으로 현실을 보는 것은 실제로 현실과 맹 격리된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주의라 불리는 것은 정확히 말해 현실의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 현실을 귀속시키거나 분류하거나, 하나의 관점(‘사실주의자’)에서만 볼 경우 논리적으로 완전한 현실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까지 존재한다. 현실을 하나의 각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각도에서 본다. 그런 상황과 각도에서 사실주의의 피해자들을 도외시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현실이겠는가? 진정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품을 들자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들을 꼽을 수 있다. 그 작품들은 적어도 사회주의 현실의 일부, 피상적이긴 하지만 가장 명백한 현실을 반영한다. 수용소.
나는 오전 6시의 나무가 정오의 나무 그리고 날이 저물 때 그 무리가 우리를 위로해 주는 나무와 같지 않음을 끊임없이 발견한다. 밤에 부는 바람이 아침에 부는 바람과 같을까? 해 질 녘의 수영객이 케이크를 자르듯 물살을 헤쳐 나가는 바다가 정오의 바다와 같을까? 시간이 나무나 경치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데, 가장 민감한 피조물인 우리가 그러한 표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다처럼 잔인하다가도 부드러워지고, 이기적이면서도 관용적이고, 열정적이면서도 또한 사색적이고, 말수가 적다가도 많아지고, 공포스럽기도 하다가 숭고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현실이 아닌 모든 현실 또는 적어도 몇 가지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
내 소설을 우연히 읽는 독자들은 하나의 모순이 아닌 여러 가지 모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색조가 아닌 다양한 색조, 하나의 선이 아닌 여러 원형들. 그래서 내 소설이 연계된 사건의 역사가 아니라, 퍼졌다가 돌아오고 확대되었다가, 참기 힘든 것이 때때로 자유로운 것이 되는 극한 상황에서, 쉼 없이 더 부드럽고 더 열정적으로 다시 돌아오는 파도와 같기를 바란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교리, 하나의 규정이나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어야 할 신비다. 파헤치려는 목적이 아니라(그것은 끔찍할 것이다) 우리가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 레이날도 아레나스, <현란한 세상>
'평론과 편린 사이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해한다는 것의 기만에 대하여 (4) | 2023.09.29 |
---|---|
생산 담론을 향한 작은 반기와 그 앞에 선 우리의 과제 :: 김재필, <ESG 혁명이 온다> (0) | 2022.01.08 |
비인간의 기록 : 편혜영, <재와 빨강> (2) | 2017.02.23 |
관능적인 혹은 원시적인 폭력 : 한강, <채식주의자> (1) | 2017.02.22 |
비극 한가운데, 비극 : <시학>, 셰익스피어 그리고 <모비 딕> (0) | 2017.02.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