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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내 것의 힘

by 디어샬럿 2019. 8. 29.

# 1.
어제까지 테일러 스위프트의 신보를 들었다.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취향과는 제법 먼 곡들이다. 그럼에도 노래엔 힘이 있다. 강한 탄성(彈性)을 지닌 내 ‘듣는 귀’조차도 이 노래들 앞에선 일단 취향의 영역으로 잽싸게 튀어돌아가려는 성질을 멈춘다. 수록곡만 열여덟 개에 이르는 이 앨범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역시나 ‘테일러-다움’일 거다. 곡의 낱장마다 녹아든 그녀의 자아는 음악을 비집어오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10년차 슈퍼스타와 인간 테일러 스위프트를 넘나드는 특유의 매력도 여전히 색을 더한다.

# 2.
오늘은 종일 마이클 잭슨 앨범을 듣는다. 살아 있었다면 예순 한 번째 생일. 우리 나이론 예순 하고도 둘이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의 생일이란 말은 슬픈 모순이다. 입에 머금는 단어 하나하나에 유난스런 습기가 밴다. 사자(死者)의 생일이라는 의표를 마주할 때마다, 아직은 새삼스럽게 울적해지곤 한다. 축하 혹은 애도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미묘한 애수가, 살아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휘감는다.

“마이클 잭슨 생일이라며 신청곡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네요.” 퇴근길 라디오는 조금은 기대했던 말과 함께 아주 익숙한 곡을 내뱉는다. 발들이 밭게 선 지금 이 순간 지하철 안에서도 그를 새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나는 무수한 인생에 어떤 형태로든 각인돼 있을 한 아티스트의 존재를 곱씹었다. 그의 음악을 타고 홀씨처럼 날아든 타인의 삶은, 어느새 내 생에 내려앉아 조용히 꽃을 피운다.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저마다의 시간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조금은 감탄하고 작게 안도하는 새, 하루를 이만치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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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수한 것이 더러 가장 보편적인 이들의 찬사를 받는다. 오롯이 개별적이고 완전히 ‘나만인’ 것,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 고스란히 녹아든 어느 삶의 결과물. 그런 것들을 만날 적엔 이따금 호흡이 가쁠 정도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자신을 온전히 내던진 서사란 그만큼 매력적이고 파격적이며 위협적이다. 그 서사가 천재성 혹은 진정성까지 끌어안게 될 때, 세계는 뿌리까지 뒤흔들린다.

자신다움을 지켜낸 것이 지니는 고유의 점도(粘度)가 있다. '자기 앞의 생'에 충실했다는 반증이기도 할 한 인간의 서사는 강한 점성을 지닌다. 무수한 취향 혹은 기억의 조각은 접착력이 높은 서사에 들러붙는다. 점성이 강한 서사는 유려한 글로, 지긋한 음악으로, 뭉근한 움직임으로 변형돼 파편화된 보편들을 부딪어 온다. 그런 변형-서사의 습격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언어의 또 다른 지평을 엿보게 하는 듯한 문장, 새로운 시공과 닿는 것만 같은 이야기, 솟구치는 감동을 누르려 애먼 침만 연달아 삼키게 하는 노래 따위들... 특수 서사를 보편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아름다운 방편이 넘쳐나는 시공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건, 정말이지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보편의 세계에 속하는 내 삶을 한층 풍요롭게 만든 건, 그저 삶에 충실했을 뿐인 어떤 개인들이 빚은 아름다운 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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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가 비어버린 곳에 서정이 자리한다.” 우연히 만난 노교수의 칼럼으로 내 세계는 잠깐 요동쳤다. 요즘의 나는 어떤 서사를 지니고 있었던가? 일상을 핑계로 더 키우지 못한 서사를 서정으로 채우려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나의 서사가 한동안 내 손길만 기다리다 시간에 떠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면, 견디기 힘든 조바심에 발이라도 굴러보고 싶은 심정이 된다.

온전한 '내 것'들로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조금은 쓴다. 지금 가진 것들로도 흔들리지 않는 생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나가기 위해 조금 더 고민한다. 나의 언어, 웃음, 마음, 존재가 지닌 점성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붙잡아둘 힘을 길러나가기를. 아직은 더없이 조악한 것들로나마 나의 세계가 질량을 더해가기를. 세계를 바꾸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니라, 다만 촘촘히 지켜낸 ‘나-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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