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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들

by 디어샬럿 2019. 7. 20.

벼르고 고민하던 맥북을 샀다. 제법 시일이 걸릴 줄 알았는데 웬걸, 하루 만에 받았다. 예상 도착일이 다음주 월요일이었던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라며 늘어져 있었는데, 어쨌든 왔다. 그렇게 나는 꽤나 느닷없이도 맥북 유저가 됐다. 근 20년 넘는 윈도우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맥의 생태계에 당혹스러워하며 정말로 오랜만에 노트북으로 포스팅을 해 보는 날이다. 문득 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어보였던 E언니가 작년 이맘때 갑자기 "나 맥북 샀어" 하며 내게 본인의 짧은 소설을 보여주던 날에 느꼈던, 참 뜬금없다 싶은 - 모처럼의 연락이 그런 거라는 데 대한, 그리고 내가 아는 이들 중 손 꼽히는 기계치인 인물이 맥북 유저가 됐다는 - 기분이 스친다. 단축키부터가 아예 다르게 생겨먹은 이 친구와 잘 지낼 수 있을까 싶다가도, (참으로 간사하게도) E언니도 적응해 낸 맥북이라면 나라고 못할 것 없지 싶은 알량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만다.

그러고보니 너무 오래 쓰지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를 조탁하는 매일을 보내면서 정작 내 이야기에는 매정하고 무심한 나날들이다. 새삼 떠올리니 기록되지 않은 채 휘발된 날들이 너무 많다. 고마운 것도 새기고픈 찰나도 한가득이었는데, 어영부영 하다 그 많은 것들을 또 시간에 대책없이 떠내려보내고 말았다. 활자로 남겨두고 싶다가도 이내 그만두고 싶어지는 사건과 사람과 마음과 관계가 온몸을 칭칭 감아대는 통에 조금은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하면 그나마 면죄부라도 되려나. 어쩌면 언어로 변환해 낼 힘조차 나오지 않는 날들...이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활자로 피어오를 그 모든 것들과 마주할 '깡'이 없었다고 할까.

'돌격' 혹은 '돌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간들을 건넌 것 같다. 앞만 보고 걸었는데, '앞'이 아닌 결과 혹은 의사들과 맞닥뜨리며 조금 더 '뒤'를 돌아다보지 않은 데 이따금 후회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제법 먼 시절 무심코 흘려버린 나의 무지가 무지막지하게 키워 낸 사건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잠도 오지 않았다. 사건과 감정들은 곱씹고 되뇌일 틈도 주지 않고 몰아쳤고, 가차없이 풍화하는 일상 속에서 내게 남을 것들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싶었다. 삶의 올이 너무 많이 풀려 있었다는 걸, 그나마 알아차린 이 시간에 감사한다.

다시 직조할 수밖에. 서툰 언어로나마, 아직은 무르기 짝이 없는 마음들로나마 내 삶을 지켜내야지. 써야만 할 이유는 이렇게 또 생겼다. 잃어가는 나의 언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도, 나는 무엇이든 쓰고 읽어야만 한다. 언어가 사라진다면 내게 남는 건 무엇일까. 소설가 김애란의 단편소설 <침묵의 미래> 혹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떠올린다. 지구상에 단 한 명이 남은 언어박물관의 모습, 혹은 언어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도 망 사이로 훅훅 빠져나가버리는 '형언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들의 잔상... 나는 그 주제와 그 대목들을 읽으며 조금 몸서리쳤다. 적확한 언어를 찾지 못해 무언(無言)의 우주로 흩어져버리고 마는 수많은 무언가들을 이렇게 표현해낼 수 있다니 하며, 그땐 조금 감탄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문장이 가리키는 활자 그대로, 언어가 정말로 사라져버리는 상황을 나는 솔직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과 닿을 적이 부쩍 늘어난 요즘의 나는, 그래서 조금 절박하다.

말들을 잡아두려 틈날 때마다 손을 뻗어대는 요즘. 앞날을 고민하는 것이 조금은 거창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날들. 일단은 당장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잘 지켜내야겠구나 싶은, 아마도 좀 더 지나 돌이키면 '견뎠다'는 표현으로 기억될 듯도 한 시간을 이고지며 가고 있는 나의 어떤 순간들. 그럼에도 새겨나가야지. 지지 말아야지. 나와 내 삶과 내 언어들을 지켜내야지.

불과 하루 만에 맥 유저가 된 것 만큼이나 느닷없는 결심으로 제법 단단해지는, 날이 궂은 주말 저녁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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