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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음악

첫 장면 - "Che gelida manina(푸치니 <라 보엠> 중)", Luciano Pavarotti

by 디어샬럿 2019. 1. 20.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른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중 Che gelida manina(그대의 찬 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 연주. 카라얀과 협연한 공연 중에선 파바로티 단독 버전으로 올라온 게 없다. 아쉬운 딴에나마 녹음된 버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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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에 대한 첫 장면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대학교 2학년 무렵의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10여 년도 더 된 기억이다. 파바로티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명세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때의 내게는 좀 더 묵직한 진파를 가지고 전해진 소식이었다. 우리 아빠가 워낙에 파바로티를 좋아했다. 1970년대 중반, 그러니까 아빠의 청춘 가운데 어느 한때,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파바로티가 내한을 왔던 적이 있었단다. 파바로티의 등장 전이라 하면 일왕이 그렇게나 좋아했다는 마리오 델 모나코, 그 계보를 이은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같이 굵직하고 힘 있는 성량을 지닌 테너들이 성악계를 주름 잡던 시절. 서구권에서야 그때부터 이미 '샛별 거장'으로 주목받고 있었던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선 인지도가 현저히 낮던 때였다나.

그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의 내한 소식을 어떻게 먼저 접할 수 있었는지 사뭇 궁금해지지만 - 왜인지 모르겠는데 이 부분을 아빠께 여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쓰고 보니 문득 떠올랐다 - , 형편이 넉넉한 친구네서 우연히 TV로 본 파바로티는 풋청춘이었던 아빠의 세계를 뒤흔든 모양이다. 성악을 전공하는 친구를 사귀고, 하루에도 몇 번씩 O Sole Mio를 부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니. 한편 그 공연을 계기로 파바로티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름을 알렸고, 머잖아 세계적인 '절대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거장의 떡잎을 알아봤다는 아빠의 '첫 장면'은 그렇게 당신의 자부심이 됐다. 그리고 그날의 첫 만남이 40년 넘는 파바로티 팬이자 이따금 아무도 없는 실내에서 O Sole Mio와 Torna A Surriento를 부르는 환갑의 삶으로 이어질 줄, 그때의 청년은 짐작이나 했을까- 한 인간의 시간의 층위에서 공고하게 퇴적된 애정이란 이렇게나 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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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날, 아빠를 위해 광화문 핫트랙스에서 CD를 골랐다. 타향살이란 참 묘해서, 그 땅에서 접한 내 근원과 관계된 것이라면 작은 진동일지라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법이다. 파바로티의 죽음을 접하며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아빠의 상실감이었다. 30년 이상 쌓아온 애정. 그 정도의 애정이라면 누구에게나 '삶'이라 부를 수 있는 영역이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온전한 나의 것은 아니었기에 격렬하진 않았으나, 생의 근원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래도 좋을 것이었기에 진원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나는 광화문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매장 한 편에 마련된 파바로티 특별관을 보며, 놀랍도록 재빠른 자본주의의 '눈치'와 그것이 주는 편의에 살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시음 기기에선 Pavarotti Essential이란 타이틀을 단 CD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입구와 가장 가까이 있던 헤드셋을 끼고 재생 버튼을 눌렸다. 데카 클래식에서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투박한 패턴이 덧대어진 탁한 하늘색 배경을 두고 파바로티가 환하게 웃고 있는 자켓의 음반이었다. 그 CD의 제일 첫 수록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꾹꾹 누르듯 들려오는 "che ge li da ma ni na", 그 뒤에 능선을 주르륵 오르내리듯 이어지는 "sela lasciriscaldar"...

그 음률들은 풍성한 양감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 머리, 가슴,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내 몸의 모든 부위가 힘껏 이 음악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때까지 클래식은 내 취향의 세계에서 전혀 고려되지 못했던 영역이었다. 누구보다도 클래식을 좋아하는 아빠 덕에 10여 년 가까이 피아노를 쳤고, 그 덕에 남들보다 조금은 더 그 세계와 친한 편이었다곤 해도 오롯이 그 장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노래의 예상치 못한 따뜻하고도 맹렬한 침투에, 나는 그래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노래가 다 있었구나, 아니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구나.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소리의 세계 한가운데 나는 놓여 있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오직 귀로 들어오는 것들로 여지껏 몰랐던 세상과 이어지는 느낌. 그건 이를테면 또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소리들이 나를 30여 년 전의 아빠에게로 데려가고 있었다. 흑백의 작은 TV를 앞에 둔 아빠의 그날도 이렇게 아득하리만치 황홀했을까. 대책 없이 쏟아지는 음악과 솟구쳐오르는 감정들이 인체라는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이 기분을, 그때의 아빠도 느꼈을까.

그날 그 CD를 두 장 샀다. 한 장은 부산 본가로 보내고, 나머지 한 장을 그 해가 다 갈 때까지 들었다. 겨울방학 때 본가로 내려가 물었다. 아빠는 파바로티 노래 중에서 뭐가 제일 좋은지. 아무래도 Nessun Dorma를 워낙 잘 하니 좋아하지만- 아빠는 잠깐 뜸을 들였다. 내가 제일 처음 들은 파바로티 노래가 Una furtiva l'agrima인데, 그 노래를 그 사람처럼 잘하는 테너를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단호한 문장과는 달리 그날의 아빠의 표정은 살짝, 다른 때완 달랐던 것 같다. 어느덧 삶이 돼 버린 오랜 애정을 돌이키면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리는 부드러운 얼굴. 너무 오래된 애정이라 말하는 것조차 새삼스럽지만, 돌아갈 때마다 언제고 맞닥뜨리게 되는 '첫 장면'이 주는 설렘. 그런 게 묻어 있었다. 처음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될 수 있다니, 애정의 힘이란 대단하구나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딱 10년이 지났다. 우리 아빠의 파바로티 토양에도 딱 10년치의 애정이 쌓였다. 인간의 생에서 40년의 애정이란 풍화와 침식을 거칠지언정 감히 '그 사람'이래도 좋을 또 다른 지평이 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날 이후, 나의 세계에도 딱 10년치의 무언가가 생겼다. 삶의 색채가 옅어진다는 생각이 들 적마다 나도 모르게 고전음악을 찾아듣는 취향의 오름이 내 안에도 생겼다. 물론 내 안의 파바로티 토양은 아빠의 그것에 비하면 무르고 성기기 짝이 없다. 일상이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덮을 적엔 보이지 않다, 한 번씩 느닷없고도 강렬한 진동으로 존재를 과시하는 아직은 보잘 것 없는 나의 취향. 요 며칠의 출퇴근길, 그리고 오늘의 길게 드리워진 게으른 오후에 파바로티를 재생하며 생각했다. 광화문에서의 나의 '첫 장면'과, 시공을 가로질러버리는 어떤 애정에 대해.

 

스물아홉의 파바로티가 부르는 Che gelida manina. 마이크 하나 없이 홀을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은 역시 놀랍다. 전임(?) 테너들에 비해 소위 '남성적인 면이 떨어지는' 소리라 평가하는 이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고픈, 젊디젊은 파바로티. 트레이드 마크인 덥수룩한 수염이 없는 파바로티라니, 볼 때마다 새롭다.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중 Una furtiva l'agrima(남몰래 흐르는 눈물). 아빠는 "이 노랠 파바로티만큼 부르는 클래식 테너가 없다"고, "힘과 감정을 황금비율로 정확히 섞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노랠 듣다 보면, 그 평가에 적이 고개가 끄덕여지곤 한다. 가득 삼킨 음을 조금씩 내뱉으며 읊조리듯 부르는 2절 초입을 정말로 좋아한다. 파바로티가 왜 파바로티인지 증명하는 부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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