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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음악

운명이다

by 디어샬럿 2019. 9. 26.

 

 

요 며칠 출퇴근길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듣고 있다. 이른바 <운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곡. 나는 카라얀의 지휘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다른 건 몰라도 베토벤 5번만은, 적어도 내겐 카라얀이 압도적이다. 베를린필의 육중하면서도 둔중하지 않고, 경쾌하면서도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 연주도 일품. 내달리는 듯한 속도감에도 음률 하나하나에 세심함을 기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운명>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이 곡만큼이나 내 운명의 향방도 참 모를 일이라는 까닭 모를 기분이 들곤 한다. 숨통을 조여올 것 같던 운명의 아귀가 돌연 등을 토닥이는 응원의 손길로 변하는 것 같은 느닷없는 변환에 또 한 번 힘을 얻는 일상의 순간들. 부제 때문인가, 이 곡엔 장면이 덧입힌다. 생의 마지막에 반듯이 누운 채로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어 올렸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로 그려진 악성의 마지막. 하필 1악장 도입부의 예의 '빠바바밤-'과 그 장면이, 어울려도 너무 잘 어울렸다.

요즘은 정말 이 곡으로 위안 받고 있다. 산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냐며, "3천 번도 더 살겠다"고 한 거장의 삶을 향한 애정이 어김없이 잔뜩 묻어나는 작품이다. 삶이라기보단 생(生) 그 자체를 사랑한 한 인간의 장엄한 선언이랄까. 이 곡을 들으며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생을 살 수 있는 인간이어서 참 다행이구나, 하고.

이 모든 흐름이 운명이라면, 나도 모르게 내 시공에 얽힌 약속들이라면, 그 순간들을 다 지나야 마주할 수 있는 윤곽이라면, 이 차원의 통로를 통과하는 것 또한 내게 주어진 숙제라면 - 이 길을 다 걸어가야지. 운명이다, 하고.

 

 

 

<운명>의 러닝타임이 애매해 <에그몬트 서곡>을 붙여 듣기 시작한 게 며칠 됐다. 인간, 네 보기에 나는 필시 녹록지 않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너를 버려도 나만은 너를 끝내 사랑하지. 생의 의미를 잊고 산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아 묵직하게 타이르는 듯, 음악의 모든 것들은 메시지가 되어 가슴에 내리꽂힌다. 이런 경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운명에 감사할 이유는 충분하리라. 베토벤은 위대하고 생이 이토록 찬란하니, 운명은 아름다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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