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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지진

by 디어샬럿 2016. 9. 13.


선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로, 유독 진도가 안 나가는 소설이다. 200쪽이 조금 넘는데도 며칠째 붙들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만 더 시간을 쪼개 보면 오늘내일 안으로 끝내리라. 대열을 무단이탈한 몰디비아 인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바라보는 쇼호프의 시선을 따라가던 찰나,

발 밑이 흔들렸다. 빈혈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이게 아닌데 싶어 고개를 들었다. 가족들의 놀란 시선들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아주 잠깐의 정지 후, 사방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쿵 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났다. 뭐야 미사일 쐈어? 뭐 떨어졌어? 당황한 눈들이 허둥대며 서로를 좇는 사이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지진이다!" 급히 TV를 켰다. 경주발 5.1 지진이 발생했다는 속보가 정규방송 아래 자막으로 흐르고 있었다.

상황이 슬슬 파악되려니 진동이 잦아들었다. 7-8초 정도 됐던 것 같다. 당혹스런 마음을 꾸역꾸역 눌러 지어낸 너털웃음들이 듬성듬성 터졌다. 이번엔 세다 그치? 여기서 이 정도 느껴진 거면 경주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밖에 나가 있던 동생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먹통이었다. 메신저도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너무 불안해 말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이어지는 이야기에 미묘한 긴장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10초가 채 안 되는 시간이 벌려놓은 전후의 간극은 너무나 컸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던 저녁 바다 공기엔, 그새 불안의 진파가 미묘하게 흘러들었다.

늦은 저녁상을 정리하고 다시 책을 들까 하던 차였다. 멀리서 클락션이 길게 울렸다. 멈출 법할 즈음까지 지속되기에 빼꼼히 고개를 빼는데, 또 왔다. 두 번째 진동이었다. 앞의 것보다 훨씬 컸다. 가만히 더듬어봐도 그 순간만은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을 정도로, 나는 당황했다. 자연으로 인해 진지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보기론 처음이었다. 부모님을 불러 잽싸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미 어르신 몇 분이 나와 계셨다. 이게 뭔 일이래? 그러게요 살다보니 이렇게 흔들리는 것도 느끼네. 누구도 불안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억누르고 숨기기엔 공포가 너무 적나라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전화와 메신저는 여전히 닿지 않았다.

웅성거리던 거리는 1시간 여가 되어서야 조금씩 전의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동생들과는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다. 동생들이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고민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뉴스에선 여전히 자세한 소식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재난문자는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다. 애초에 믿어왔던 것도 아니지만, 드는 것이라곤 정말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뿐.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배낭을 챙겨와 비상용품들을 욱여넣었다. 여차 하면 바로 메고 뛰어나갈 만반의 준비는 해둔 채, 다들 한동안은 앉지도 못하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살 길은 우리가 찾아야 해. 이 나라에선 그래야 할 것 같아. 그 짧은 순간 재작년과 작년의 4-5월이 떠올랐다. 그래, 여기선 정말로 그래야 해.

구르미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ㅡ 어... 실은 꽤(?) 몰입했다...... 그 고백 앞에선 몰입할 수밖에 (주절주절) ㅡ 다시 뉴스를 켰다. 그제야 속보다운 속보가 쏟아졌다. 두 번째에 5.8짜리 더 큰 지진이 왔고, 진파가 커 전국이 흔들렸으며, 여진이 40여 차례 이어지고 있다고. 할 말을 잃었다. 대처로만 보면 5.8은커녕 2.8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각자도생이다.

만일에 대비해 돌아가며 깨 있기로 했다. 요사이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던 내가 첫 타자다. 솔제니친의 소설을 다시 펴 들었다. 활자가 널을 뛴다. 책은 잠시 쉬고, 일기를 남겨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뜬눈으로 지새울 것 같다. 인간은, 정말로 작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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