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열람실 창 방충망에 무언가 꼼짝 않고 붙어 있다. 시력이 좋지 않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항상이라곤 할 수 없지만 주기적으로 눈길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느 때처럼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날씨가 궂은 날만 아니면, 나는 도서관 창을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창에 드리운 커튼을 좋아한다.
그 커튼은 눈에 익다. 처음엔 분명 새하얀 색이었을 그 실크 커튼은, 시공의 더께를 입어 아이보리에 가까운 낯빛이 된 지 오래다. 그 커튼을 많이 봤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학창 시절 내내 교실에 나부끼던 것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기본가 정도나 겨우 맞출, 값나갈 리가 없는 무색무지 커튼이다. 요즘은 블라인드로 많이 대체된 모양이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 커튼은 '관'의 상징 같은 거였다. 흡사 나일론 같아 보이기도 했던 얇은 실크 커튼은 학교나 관공서마다 있었다. '막는' 임무는 오로지 가격만큼 최소한도로만 하겠다고 선언이라도 하듯,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하얀 커튼. 역설적이게도 덕분에 그 얇디얇은 천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와도 교실 안쪽으로 곡선을 크게 그리며 휘어졌다. 커튼이 만들어내는 바람의 모습은 어린 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나는 커튼이 바람을 품을 적을 제일 좋아했다. 바람이 교실 안쪽으로 불어올 때마다 실크 커튼은 가슴을 후욱 부풀어올렸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때론 아슬아슬 천장에 닿을 때까지 커튼은 바람을 가득 안고 후욱 후욱 부풀었다. 그 광경은 정말로 매혹적이었다.
커튼과 바람 그리고 내 감동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그늘이 적당히 있어야 바람에 선도가 더해지는 법. 햇빛이 직사광선으로 들어오는 정남향보단 살짝 방향이 틀어진 교실이 제격이었다. 그런 점에선 중학교 3학년 때 교실 만한 곳이 없었다.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해가 자오선을 넘기 전, 그러니까 11시가 막 지난 즈음이 가장 좋았다. 그보다 때가 넘어가면 햇빛이 너무 강해져 바람이 잦아들었다. 태양이 최고도점을 열 발자국 정도 둔 때, 딱 그때가 좋았다. 거기다 오전 수업만 하고 돌아가는 토요일이면 더할 나위 없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한끗 차이로 놀토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돼 버렸지만, 외려 그래선지 '정상수업' 토요일은 극적인 데가 있었다. 네 시간 남짓의 오전수업만 견디면 휴일의 틈에 드는 토요일 오후가 선물처럼 주어졌다.
정남향 건물에서 홀로 동향으로 고개를 빼죽 내밀었던 3학년 10반 교실에서의 토요일 오전 11시. 그때 그 순간을 읊조리면, 다문 입 안의 혀끝으로도 시공을 넘어 감동의 미열이 전해진다. 여유가 흐르던 교실에서, 기분 좋게 왼쪽 뺨을 밀어올리며 닿아오던 산들바람을 머금은 실크 커튼이 입 안에 공기를 가득 담은 아이의 볼처럼 하얗게 하얗게 부풀어오르는 풍경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당시의 감정을 뭐라 말해야 좋을까. 그저 나는 완전히 매료돼 멍하니 커튼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도서관의 커튼은 그때 그 교실의 그것을 닮았다. 그러나 아주 같다곤 할 수 없다. 나도 변했다. 그땐 정말 그 시간만 되면 홀린 듯 창가를 봤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무래도 십 년도 더 지나고 보니 그때와 같은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이따금 펄럭일 것처럼 훅 부푸는 커튼을 볼 때면 여전히 기분은 좋지만, 역시 그 시절만큼은 못하다. 정서나 감정 역시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만이 독점되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바람을 머금은 실크 커튼을 볼 때마다 그 시절의 내가 느꼈던, 내가 이 바람을 한껏 들이킬 수만 있다면 저 커튼처럼 몸이 후욱 후욱 후욱 부풀어오르지 않을까 했던, 그래서 커튼이 둥글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마셨던 그때의 감성은 역시 그때여야만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바람과 그 커튼보다는 그 시간들을 더 좋아했던 것인지도 몰랐겠구나 싶다. 분명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 가질 수 없다면 놓아야 한다는 진리 또한, 서른이 되고서 '피부로' 터득해가고 있는 것 중 하나다. 사실 슬프단 말에 멋쩍어지리만치 나는 그 커튼에 대한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게 됐다.
오늘은 모처럼 부풀어오르는 커튼을 봤다. 책에서 잠깐 눈을 떼고 바라보던 것도 잠시, 감상은 역시나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늘상 보던 창이어선지 낯선 것은 금세 눈에 들어왔다. 나비였다. 이쪽엔 배를 드러낸 채, 나비는 방충망 위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날갯짓 한 번 하지 않았다. 실크 커튼이 부풀 만큼 바람은 충분히 불어오는데, 날개든 더듬이든 미동도 않은 채였다. 나는 한동안 나비를 바라보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시간 지나면 날아가겠지. 뻣뻣해진 뒷목을 풀려 한 시간 뒤쯤 고개를 들었을 때도 나비는 그 자리였다. 말도 안 되는 줄 알지만 누구나 으레 품을 법하게, 나 역시 저 나비가 혹 나를 지켜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비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공부해야지. 유치하지만 제법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파묻히듯 책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가 이따금 안마 겸 머리를 치들었다.
그러길 서너 번 했으니 족히 서너 시간은 지났겠다. 오후 세 시경, 무거워진 눈꺼풀에 못 이겨 잠깐 잠을 청했다. 십 분이나 지났나. 다시 일어났을 때 바라본 창은 깨끗했다. 나비가 떠난 것이다. 서너 시간도 거뜬히 견뎠던 나비는 고작 내가 눈길을 피한 십 분 여 만에 자취를 감췄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아주 약간의 허무와 함께, 우습게도 약간이 아닌 정도의 뜨악스러움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정말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불과 십 분 전까지 나비가 앉았다 갔다는 사실을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창은 티끌 한 점 없었다. 커튼은 새침이라도 떼듯 부풀었던 서너 시간 전을 잊고 얌전히 창가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언제고 어떤 나비고 오늘처럼 창에 앉아 나의 시계를 건드리겠지만, 내가 언제고 오늘과 같은 마음으로 나비만을 위해 내 의식을 내어줄 수 있을까. 아주 높은 확률로, 오늘 나비에게 느꼈던 감정은 오직 오늘만의 것이 될 터다. 설령 비슷한 것을 느끼더라도 분명 꼭 오늘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실크 커튼을 보고 열 몇 살의 두근거림을 느끼지 못하듯이.
오로지 그때만이 완벽하게 닿을 수 있는 감정이란 건 역시 존재한다. 감정의 서고가 있다면, 이런 류의 것은 소위 연령제한 같은 게 걸려 있는 셈이다. 저, 제가 그 감정이 그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그러는데 잠깐이라도 빌려볼 수 있을까요? 라고 지금의 내가 부탁해도 이를 어쩌죠, 그쪽은 이미 너무 나이가 들어서요 라는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이 역시 어떤 의미에선 상실이다. 되찾을 수 없달까, 말하자면 잃어버린 감정이다. 상실감으로 기분 좋아질 사람은 없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분명 슬펐을 거다. 그러나 요사이는 조금 다르다. 별 수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모든 감정과 기억에 항상성이 적용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다행히도, 이런 걸로 슬퍼하지 않는다. 다시 오지 못할 감정이면 어때. 흘러간 만큼 새로운 것을 채우면 된다. 대신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그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니 괜찮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이가 드는 것도 참 괜찮네.
p.s 그런데 암만 생각해봐도 녀석의 생김새가 좀 묘해서 네이버의 도움을 받았다. 앉은 모양새를 보고 나비와 나방을 구분한단다. 날개를 겹쳐 앉으면 나비, 펼쳐 앉으면 나방. 녀석은 날개를 쫙 펼친 채였다. ...너 나방이었구나.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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