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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변해가는 것들, 흘러가는 것들

by 디어샬럿 2014. 12. 12.

 

 

 

 

  Y언니와 2년 만에 만났다. 그새 결혼한 언니는 유부녀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으리만치 여전했다. 연남동까지 달려와 준 언니와 태국 요리점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서 정통 파푸아뉴기니 커피란 걸 한 모금 마셨다. 그간 커피에의 미련에 종지부를 찍게 한, 실로 엄청난 맛이었다. 텁텁한 입을 달래기 위해 투썸에 들어가 다디단 케익을 놓고선 바로 수다 삼매경에 올랐다. 끊긴 시간만큼 쌓아뒀던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사이, 어느덧 밖은 눈발이었다.

 

  언니와는 고시반에서 동기로 만났다. 학번도 전공도 생활반경도 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그것'에 대한 꿈이 있었다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그곳이 아니었다면 서로 얼굴 한 번 보고 졸업하기도 힘들었을 터다. 순전히 목표로 만나고 묶인 관계였지만 계기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같은 꿈과 공간의 힘이라기엔 그곳의 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별나게 친한 편이었다.

 

  우리는 떡볶이 반찬이 맛있었던 단비분식에 매일 같이 출석했고, 데얼즈팩토리 카페와 고시반 세미나실을 오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나는 언니를 따라 '데팩'의 홍차라떼 톨 사이즈를 시키곤 했다. 인심 좋게도 커서 한 손으론 들기도 힘들었던 홍차라떼를 양손으로 감싸며 우리는 하하호호 말들을 주고받았다. 허심탄회하면서도 거친 구석 없는 세련된 언어와, 내 시야에서 벗어난 부분을 살뜰히 챙기는 언니의 독창적인 시선을 나는 정말로 좋아했다. 그녀의 재기발랄한 말들과 나의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잔뜩 살아 춤추던 시간들. 조금은 진지했던 연애상담과, 음울해질 수밖에 없었던 진로상담을 넘어 눈 깜짝할 새 맞이한 결혼에 설렘 반 떨림 반으로 채워진 어느 겨울부터의 기억들. 각자의 현실에 좀 더 냉정해져야 하는 시기와 맞닥뜨리면서 어느 순간부턴가 얼굴 보기도 여의찮아졌지만, 내게 언니는 언제고 그 무렵의 언니다. 그녀의 표현을 덧입고 날아오르던 문장들만큼이나 반짝이던, 스물다섯의 꿈 많은 여대생의 모습으로.

 

  당시 생활의 대부분이었던 고시반은 유쾌하고도 묘한 곳이었다. 그 공부의 성격만큼이나 개성 뚜렷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 모이래도 힘들겠다며, 우리는 가벼운 자조 섞인 자평 후 또 깔깔대곤 했다. 고시반은 옛 여자 기숙사 건물 지하에 있었다. 내 자리는 104호의 볕 잘 드는 창가 쪽이었다. 고정적으로 나오는 인원은 열 명 남짓. 둥그런 세미나실 탁자에 옹기종기 붙어앉아 갖은 수다를 떨다가, 사뭇 진지해져선 우리 교수님 사람 하난 잘 뽑는 것 같단 낯간지러운 소릴 했다. 그러곤 서로의 얼굴을 애매한 눈빛으로 쳐다보다, 실없는 말 한두 마디 내뱉곤 이를 다 드러내놓고 웃었다. 점심을 좀 늦게 먹는 반면 저녁을 일찍들 들어 배가 채 고프지 않은 채로 늘 저녁밥을 먹었다. 단골 메뉴는 후문의 차이홍이라는 중국집. 가뜩이나 환기가 안 되던 세미나실에선 짜장면 냄새가 옅게 감돌았다.

 

  그 시절 우리의 관심사는 다양했다. 방송사나 신문사의 일원이 되는 것 외에도, 여러 문제와 흥밋거리가 젊디젊은 청춘들의 머리 위를 떠 다녔다. 오늘 밥 뭐 먹지 같은 원초적 선택부터 누구와의 소위 썸, 채 말 못 할 이런저런 개인사는 물론 어제 본 TV 프로그램이나 요즈음의 사회현상까지 제각각이었다. 우리는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다가도 치열하게 토론했고, 이런저런 슬픔에 위로를 주고받다가도 세상이 떠나갈 듯 웃었다. 열없는 유대감 혹은 객쩍은 일체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핑퐁처럼 튀어오르던 공간. 그 무렵, 그곳은 그랬다.

 

  영원할 줄 알았다는 말조차도 무의미할 정도로 당연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간 공간. 그때의 무엇들은 여전하지만 누구도 남아있지 않은 공간. 못 잊을 줄 알았던 시간과 사람...이 있었던 공간. 현실 그리고 시간이라는 모래바람이 그 시절 그 공간의 모두를 휘감아버렸다. 우리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바람에 여기저기 등 떠밀리다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언젠가는 떠올리는 것조차 쑥스러운 일이 될, 먼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초조함에 목울대가 콕 막힐 때가 있다. 아무렇지 않게 잊기에는 너무나 즐거웠고 두근거렸고 때로는 가슴 시렸던 공간. 104호 창가 자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자리가 되었고, 이젠 다시 찾아가도 잔뜩 깃든 어색함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내게 고시반은 언제나 네 해 전 이맘때의 기억이다. 추억의 단면에 진작 접어든 어느 시절이자, 4차원에서나 존재하게 된 시공. 가끔 이렇게 더듬으면, 아직도 그때 그곳을 이리저리 떠돌던 온갖 소리와 눈빛과 마음들이 손에 잡힐 것 같다.

 

  Y언니와 2년 만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진득하게 대화한 건. 우리는 연애-라는 말이 조금씩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고 있음을 어렴풋이 자각하며, 그 단어를 입에 담지 않은 채 어떤 사람과 결혼과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 얼어붙은 취업시장과, 당장 닥친 어색한 관계들을 고민했다. 그나저나 우리 그때 자주 갔던 데팩 말야, 폐업한 거 알아? 아 정말? 왜? 월세를 감당 못 했다나 봐. 이제 다른 거 생겼대. 흩날리는 눈발을 피해 작별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또 하나의 추억이 점멸했다. 얼어붙기 시작한 길을 조심조심 밟으며, 나는 가끔 찻잎 조각이 씹히곤 하던 그 카페의 홍차라떼를 떠올렸다. 가루눈이 닿는 입가에 침이 자꾸 고인다.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연스레 흘러가고 떠나간 것 뿐인데. 정신 차려보니 무릎이 훅 하고 꺾여있는 느낌이다. 무심하게도 변해가고 사라져가는 것들이, 아직 내게는 쓰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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