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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about R

Heal the days

by 디어샬럿 2014. 12. 11.

 

 

 

 

  연남동 생활 이틀째다. 한층 다양해진 채널 덕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넘실대는 작은 라디오를 켜는 게 하루의 시작이 된 일상. 오늘 아침의 선택지는 전현무였다. 위트로 중무장한, 의외로 냉철한 음성이 빠른 템포로 흘러나온다. 샤워실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힐 더 월드를 듣다, "김종국 씨가 팝송도 잘 부르네요" 라는 청취자 문자에 너무해~ 혼잣말하며 눈을 살짝 흘기고 웃었다.

 

  공덕동에 있는 마트에 들러 토마토와 현미 등 이것저것 샀다. 매장이 생각보다 좁고 물건이 생각보다 없었다. 별 거 없는데도 종량제 봉투를 가득 채운 장거리들을 낑낑 들며 버스에 올라타, 다음번엔 합정동 쪽에 있는 마트엘 들러봐야겠다 생각했다. 알고 보니 공덕동보단 합정동이 이쪽서 훨씬 가까웠다는 건 방에 돌아와서야 안 사실. 참 이 동네, 상수동이랑 쭉 연결돼 있었지... 아직 거리 개념이 덜 잡혔다.

 

  사 온 토마토를 깨끗이 씻어 점심으로 먹고 현미는 세 시간 불려 냄비로 밥을 했다. 얼마 안 걸릴 줄 알았는데 한 시간은 너끈히 들었다. 방에서 부엌이래봤자 이삼층 남짓이지만 읽을거리랍시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챙겨가길 잘했다. 밥 보느라 살피느라 야금야금 1/3까지 읽었다. 그러고 보니 냄비로 밥 짓는 건 2년 전인가, 한식자격증 준비한답시고 콩나물밥 한 이후로 두 번째다. 연기랑 냄새로 얼추 불조절을 한다고 했는데도 막판에 못 참고 뚜껑을 여는 바람에 뜸을 오래 들여야 했다. 그래도 처음 한 현미밥 치곤 전기밥솥 수준으로 잘 돼서 만족. 어차피 집에 두면 아무도 먹지 않을 간 안 한 검은콩과 생 브로콜리도 챙겨와 든든하게 한 상 했다. 한동안 백미밥 먹고 속이 불편했는데, 손이 좀 가도 이 편이 훨씬 괜찮은 것 같다.

 

  설거지에 뒷정리까지 끝내고 돌아오니 어느덧 배캠 시간이다. 씻으려고 준비하는데 웬걸, 또 힐 더 월드다. 이번엔 6분 24초짜리 댄져러스 정식 버전. 음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들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노라면 마이클잭슨이 왜 이 노랠 썼는지 가슴 깊이 느끼게 된다는 철수삼촌 첨언에 공감하면서. 얼마 안 가 이어진 청취자 문자에는 "형님~ 마이클잭슨의 헬더월드 좀 틀어주세요" 라는 게 왔다고. 글자 하나로 의미가 참 달라지죠? 라고 철수삼촌은 피식피식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파하하 웃었다. 의도치 않은 엉뚱한 웃음 덕에 모처럼 유쾌한 저녁.

 

  밖은 철을 만난 추위가 득의양양하다. 방은 애써 때를 거스르려 전기담요며 뜸돌로 중무장한 열기 덕에 따뜻하다 못해 건조할 지경이다. 뉴스를 연이어 본 후 꽤 오랜만에 틀어보는 10시 타임 라디오. 한때 장대라를 열심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만 그런건지 은근하지만 상당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돌아선 꿈음으로 밤에 깊이깊이 빠져드는, 오늘 하루의 자동기술적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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