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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about R

심야 라디오의 여남은 시간

by 디어샬럿 2014. 12. 5.

 

 

 

 

  면접 이후부턴 온종일 라디오다. 아침 8시께부터 저녁 8시까지는 으레 틀어놓으니 정확히 반나절이다. 대개 전현무나 당아박으로 시작해 9시가 되면 김동규 아저씨나 김창완 아저씨 목소리를 듣다 11시발 씨네타운으로 오전 시간을 보낸다. 점심을 먹으며 최파타나 임백천 아저씨 라디오를 듣고, 2시 즈음이면 한동준 아저씨표 FM POPS로 어깨를 덩실덩실. 왕영은 언니(라 부르고 싶다, 이분은 왠지)나 오발로 오후를 나다가, 해질 즈음이면 저녁을 먹으며 어김없이 배캠을 듣는다. 철수삼촌의 끝인사 무렵 가족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라디오와 함께 한 하루도 저문다. 다들 좀 늦거나 혼자 있게 되면 음악공감이나 클래식 FM, 꿈음 정도 듣는 것 같다.

 

  밤에 라디오를 듣는 일은 많지 않다. 타고난 올빼미족은 아니라 심야 라디오는 챙겨듣기도 힘들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거의 심야 라디오들이었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룰 적엔 언제부턴가 라디오를 들었다. '부족의 북소리'를 연상시키듯 시끌벅적한 주중 라디오와는 확실히 다른 매력이 있다. 뜬눈으로 지새우게 된 한밤, 누군가의 목소리와 음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었던 마음 귀퉁이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주제도 선곡도 마니악하지만 대체로 신선하고 퀄리티도 수준급이다. 본방사수는 못 해도 다시듣기로라도 꼬박꼬박 들었다. 최근 가장 좋아한 건 새벽 3~5시의 케즐사 혹은 애프터클럽과 그 바로 앞 시간대의 나얼의 음악세계. 그러던 중 케즐사는 갑작스레 폐지됐다. 케즐사의 부재도 아직은 낯선 마당인데 ―

 

  나얼마저 하차한단 소식이 들렸다. 얼마 안 한 것 같은데 벌써 3년째. 앨범 작업에 전념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뮤지션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는지도. 그럼에도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하고 알알한지 모르겠다. 유일하다시피 흑인음악을 다루고, 유난스러우리만치 LP를 고집하던 프로그램. DJ가 해외에 나가 직접 음반을 구해다 올 정도로 선곡 하나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덕분에 소울 매력을 알았다. 30센치짜리 비닐 레코드 이상의 시간이 어린 음들이 주는 온기가, 낯설고도 진득한 노래들 속에서 한껏 묻어나곤 했다. 특별하거나 거창한 말들이 아니어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진한 음색들이 전하는 깊은 울림과 짙은 갈빛 향기에, 나얼의 담담한 목소리가 더없이 어우러졌던 프로였다. 이 분야에 정통한 나얼 DJ의 간결하면서도 깊은 해설도 백미였다. 바람에 스치듯 자신과 음악과의 인연을 말할 적을 가장 좋아했다. 의례가 아닌 순수한 애정이 빚어낸 노래와 시간들. 프로그램은 남는 모양이지만, 나얼이 아닌 음악세계란... 당장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봤자 모든 건 적응하기 마련. 한때 아쉬웠던 흔적조차 무안해질 정도로 새로운 <음악세계>에 익숙해지겠지. 나얼의 음악세계란 이름은 올해 말까지. 딱 이십 몇 날만이라도 본방사수 해볼까 싶다. 언젠간 추억이 될 남은 현재를, 사라질 시간들을 기리는 가장 작은 방식으로. 사흘 전에 담근 생강차를 꺼내 마시며 라디오를 다시 켠다. 지금은 음악공감. 제법 매운 생강에 콜록콜록 밭은 기침을 내뱉으며, 이대로 심야 라디오를 기다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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