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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about R

어느 저녁

by 디어샬럿 2014. 12. 4.

 

 

 

 

  오랜만에 맞은 평범한 저녁이다. 오후께 산 가자미를 다듬어 미역국을 끓이고, 부추를 한 단 사다 국간장과 멸치액젓에 고춧가루 팍팍 뿌려 무쳤다. 간하지 않고 삶은 검은콩에 브로콜리와 양배추 그리고 생굴까지 내니 고기 하나 없이도 멀끔한 저녁 한 상 태가 난다. 풀밭 바다밭이지만 단촐하고 깔끔해 좋다. 으레 겪었던 속 더부룩함도 없다. 가공식품과 밀가루, 커피와 초콜릿 없인 못 살던 인생을 청산하고자 마음 먹은 지가 나흘 정도 됐다. 매일 아침을 열던 커피우유도, 배가 불러도 때깔에 눈이 돌아가곤 했던 빵도 완전히 끊은 지 아직은 불과 사흘째. 다이어트에 목매달며 끊자 싶을 땐 그렇게도 생각나더니, 목전에 건강을 두니 안 먹어도 이렇게나 살 만하다. 미각의 순간이란 이토록 찰나인 것을. 그 잠깐에의 탐닉에 번번이 굴복하고야 말았던 시간들을 돌이키며 반성한 며칠.

 

  덕분에 모처럼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도 늘었다. 자그마한 구식 라디오에서 흩어지는 음으로도 금세 그득해지는 2평 남짓의 공간. 이 작은 터에서 밥도 안치고 국도 끓이고 채소도 가다듬는다. 수도권이 아닌 관계로 들을 수 있는(혹은 들을 만한) 채널이 한정적인데, 본의 아니게 7080 채널을 고정으로 듣고 있다. 이쪽이 취향인지 어느새 정이 많이 들었다. 특유의 이지리스닝 선곡 덕에 귀도 편하고 연륜 있는 사연에 감탄도 하고. 어느 틈에 가는 줄도 모르게 시간이 이만큼 가곤 한다. 소리와 아주 약간의 인공 불빛만이 존재하는, 밥내음만으로도 빈틈없이 향과 온기가 들어차는 이곳이 요 최근 일상의 대부분이다.

 

  오늘은 일찍이 저녁 준비도 다 끝내고, 가족들을 기다리며 부엌 한 켠 식탁에 앉아 간만에 노트북을 펼쳤다. 여느 때처럼(?) 의식의 흐름에 손을 맡기다 문득,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눈을 돌렸다. 뭐랄까, 이 집의 모든 것들이 내 호흡을 따라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횡경막처럼 오르내리고 부풀었다 숨죽였다 반복하는 세계. 소곤대던 라디오마저 잠시 끄고 눈을 가만히 감았다. 톡 톡 톡 톡, 아주 찰나의 여운을 머금고 매 초를 전진하는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머무는 ― 미세한 소리의 시간. 발걸음처럼 걷던 시간은 곧 물처럼 흐른다. 졸졸대는 시간이 가득 메운 공간. 가끔은, 침묵 뿐인 3차원의 세상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가 있다. 소리가 절실해지는 순간을 위해서라도.

 

  다시 켠 라디오에선 쿨의 겨울표 발라드가 흐른다. 잠시 식었던 온기를 기다렸다는 듯 채울 기세로 쏟아져 나오는 소리, 소리, 소리들. 흘러간 유행가가, 대놓고 감성으로 떡칠을 한 사연들이 새삼스럽다. 잠깐의 고요 뒤에 찾아온 소리들이 유난히 따뜻하고 해사하다. 아주 익숙한 것들이 반가워지기 위해선 낯선 쉼표가 필요한 법이다. 김종서와 셀린 디온과 클라이브 그리핀과 빌리 조엘이 흐르는 어느 저녁. 이런 일상이라면, 감히 행복이래도 적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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