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밀의 화원/about R

어느 날 라디오가 내게 말했다

by 디어샬럿 2019. 8. 16.

뭐가 그렇게 당연했던 걸까. 간신히 버틴 하루가 어깨 위로 가차없이 무너져내리는 일상의 끝. 견고히 두른 무심함 사이로 순간순간 날을 들이미는 울화와 설움을 꾹꾹 참으며 라디오를 켰다.

배캠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한때는 내 나날의 끝을 알리던 프로그램이었다. 그게 벌써 십육칠년 전 이야기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건 아마도 작년 말.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배캠에선, 김영하 작가의 약간 더 결이 곱고 조금은 더 가벼우며 미지근한 속도감이 단어마다 뒤따르는 특유의 목소리가 배철수 아저씨의 느긋한 음성을 대신하고 있다. 철수 아저씨의 휴가를 메우기 위한 스페셜 DJ가 됐다며, 페이스북 페이지에 남긴 그의 글을 본 기억이 났다.

문득 털어놓고 싶었다. 무장해제 상태로 튀어오르려는 감정의 생니들이 혹여나 잇자욱을 내지는 않을까 몇 번이고 에두르며 애먼 말들을 헤집었다. 차마 뱉지 못한 언어들을 SMS에 욱여넣으며 못난 마음과 다시 한 번 대면했다. 요 몇 달 새 처음 정면으로 마주한 감정은 덩굴째 뭉쳐 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였던가, 조금 당혹스러웠다. 고심 끝에 고른 단어들마저 날이 서 있었다. 백스페이스를 터치하려다,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 날것의 활자들은 곱씹을 수록 군맛이 났다. 피맛이 날 줄 알았는데, 썩고 묵은 군내가 났다. 나는 당황했고, 이내 슬퍼졌다. 누르고 막아대기만 하는 통에 출구가 막힌 감정들이 끝내 뿌리를 내린 곳은 언어였다. 그 말들은 진득하게 눌러붙은 감정으로 잔뜩 곰삭아 있었다. 찔리고 씹혀도 피를 뿜지 않는 것은 산것이 아니다. 핏내마저 나지 않는 나의 언어는 그래서 서글펐다. 이 정도였는데,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와 일상과 생활을 버려왔을까. 그렇게까지 살 필요도 없었고, 살아서도 안 됐는데. 나에게 너무 무지했고 내게 너무 가혹했다.

-

"제 마지막 방송을 여러분과 온전히 함께 하고 싶어서요, 오늘 게스트는 없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스페셜' 방송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맞다. 소중한 것은 온전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우주의 시간은 무한할지언정 나의 순간은 오직 지금 뿐이다. 살아내야 할 건 바로 지금이고, 지킬 것은 오직 나다.

맞다. 나는 내가 지킨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을 가장 잘 알아주는 장소와 사람과 시간을 위해서만이 가장 나다운 나를 보일 일이다. 이 좀스럽고 서러운 찰나로라도 나를 지켜내는 현명함을 얻을 수만 있다면. 때로는 뜨악스럽기까지 한 사건들의 막다른 모퉁이에 몰려야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나라면야. 나를 찾을 수만 있다면, 절대 지지 않을 테다. 정말 간만에 마주하는 감각의 사각(死角)에서 모처럼의 라디오가 내게 들려주는 말. 맞아, 네가 제일 소중해, 예림.

 

 

'비밀의 화원 > about R' 카테고리의 다른 글

Heal the days  (0) 2014.12.11
심야 라디오의 여남은 시간  (0) 2014.12.05
어느 저녁  (0) 2014.12.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