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렇게 당연했던 걸까. 간신히 버틴 하루가 어깨 위로 가차없이 무너져내리는 일상의 끝. 견고히 두른 무심함 사이로 순간순간 날을 들이미는 울화와 설움을 꾹꾹 참으며 라디오를 켰다.
배캠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한때는 내 나날의 끝을 알리던 프로그램이었다. 그게 벌써 십육칠년 전 이야기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건 아마도 작년 말.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배캠에선, 김영하 작가의 약간 더 결이 곱고 조금은 더 가벼우며 미지근한 속도감이 단어마다 뒤따르는 특유의 목소리가 배철수 아저씨의 느긋한 음성을 대신하고 있다. 철수 아저씨의 휴가를 메우기 위한 스페셜 DJ가 됐다며, 페이스북 페이지에 남긴 그의 글을 본 기억이 났다.
문득 털어놓고 싶었다. 무장해제 상태로 튀어오르려는 감정의 생니들이 혹여나 잇자욱을 내지는 않을까 몇 번이고 에두르며 애먼 말들을 헤집었다. 차마 뱉지 못한 언어들을 SMS에 욱여넣으며 못난 마음과 다시 한 번 대면했다. 요 몇 달 새 처음 정면으로 마주한 감정은 덩굴째 뭉쳐 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였던가, 조금 당혹스러웠다. 고심 끝에 고른 단어들마저 날이 서 있었다. 백스페이스를 터치하려다,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 날것의 활자들은 곱씹을 수록 군맛이 났다. 피맛이 날 줄 알았는데, 썩고 묵은 군내가 났다. 나는 당황했고, 이내 슬퍼졌다. 누르고 막아대기만 하는 통에 출구가 막힌 감정들이 끝내 뿌리를 내린 곳은 언어였다. 그 말들은 진득하게 눌러붙은 감정으로 잔뜩 곰삭아 있었다. 찔리고 씹혀도 피를 뿜지 않는 것은 산것이 아니다. 핏내마저 나지 않는 나의 언어는 그래서 서글펐다. 이 정도였는데,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와 일상과 생활을 버려왔을까. 그렇게까지 살 필요도 없었고, 살아서도 안 됐는데. 나에게 너무 무지했고 내게 너무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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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지막 방송을 여러분과 온전히 함께 하고 싶어서요, 오늘 게스트는 없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스페셜' 방송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맞다. 소중한 것은 온전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우주의 시간은 무한할지언정 나의 순간은 오직 지금 뿐이다. 살아내야 할 건 바로 지금이고, 지킬 것은 오직 나다.
맞다. 나는 내가 지킨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을 가장 잘 알아주는 장소와 사람과 시간을 위해서만이 가장 나다운 나를 보일 일이다. 이 좀스럽고 서러운 찰나로라도 나를 지켜내는 현명함을 얻을 수만 있다면. 때로는 뜨악스럽기까지 한 사건들의 막다른 모퉁이에 몰려야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나라면야. 나를 찾을 수만 있다면, 절대 지지 않을 테다. 정말 간만에 마주하는 감각의 사각(死角)에서 모처럼의 라디오가 내게 들려주는 말. 맞아, 네가 제일 소중해, 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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