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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지워져도 무방할 이야기

by 디어샬럿 2015. 6. 10.

 

 

  모처럼 무언가를 쓰는 것 같다. 용기가 필요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꾹꾹 누르는 이 와중에도 고민이 들락날락거린다. 그냥 창을 꺼 버릴까, 노트북을 덮어버릴까, 읽던 거나 마저 읽고 듣던 거나 마저 들을까. 그럼에도 모처럼 옮겨보고자 한다. 별 거 아닌 말들을 내뱉을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부담이 느껴지는 이유는 ― 너무 오랜만이어서인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다시 한다는 것이.

 

 

  아침운동을 나가지 않은 지 꽤 됐다. 일찍 일어나는 게 약간 힘들어졌다. 한때 부족했던 만큼의 잠에 잠식당한 것 같은 날들이 요 몇 달 째 이어지고 있다. 어슴푸레하게 여명이 감도는 하늘을 보며 조깅을 하던 기억이... 조금 먼 일처럼 느껴진다. 대신 저녁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적인 측면이라든지 소위 공복운동 효과라는, 효율 면에서야 아무래도 아침운동만 못하다. 기분 면에서도 그렇고. 그럼에도 저녁 조깅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체력 때문이다. 힘이 비축된 상태로 움직일 수 있어 훨씬 먼 거리를 달리게 되니 말이다. 어차피 운동도 나 좋자고 하는 건데 싶어, 당분간은 저녁운동으로 방법을 선회하기로 했다. 장르 가릴 것 없이 뜀박질에 딱 맞는 템포의 곡들로, 음향을 반절 정도 올려놓고 들으면서 정신없이 뛰는 나날 ― 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돌 노래가 대부분이다. 어렸을 때 끼고 살다시피 했던 90년대 댄스음악도 제법 된다. 신기하게도 운동할 땐 그런 게 잘 어울린다. 4분의 4박 특유의 비트에 맞춰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다가 조금 걷고, 다시 뛰곤 한다. 요즘 같은 날엔 그나마 볕이라도 안 나는 밤이 뛰기엔 적격이다. 정신 없이 뛰다보면 가끔은 늦어져 돌아가야만 하는 시각이 아쉬워진다. 그나마 이런 시간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싶은.

 

  한 달 전 제주도에서 샀던 책 한 권을 아직도 붙들고 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소설이다. 제주서 돌아오는 비행기편이 급작스레 결항되는 바람에 대기하는 겸 공항서 산 책이었다. 채 스무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계속 손이 안 가던 차였다. 집에 굴러다니는 모양새를 봐도 모른 체 다른 책들을 보던 중, 마음 잡고 차근차근 읽어나가자 결심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부끄럽게도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남미 쪽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았으니 그 계열로는 거의 처음이래도 무방할 듯 하다. 약간은 생소한 문체에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1권과 2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직 1권을 떼지 못했다. 상당량을 읽었음에도 사건은 아직이다. 전개가 제법 더디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열없이 찝찝한 마음도 드는데, 얼른 읽고 치워야겠다는 생각도 한 켠에 피어오른다. 그래도 그럭저럭 재미는 있다. 그라나다의 열기와 여유가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 같은 묘사가 일품이다. 번역이 조금만 더 매끄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오랜만에 꿈에서 반가운 이를 만났다. 아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꿈에서의 우리는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떡의 식감이 기가 막혔고(이런 게 느껴지는 꿈이라니,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나다), 나는 신이 나서 그이에게 이것저것 떠들어댔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으로 대중없는 수다를 가만히 듣던 그는 가끔 장단을 맞추다가, 발랄한 목소리로 주제를 던졌다. 나는 또 냉큼 그걸 집어다가 꺄르륵 꺄르륵 방정 맞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그는 다시 예의 그 눈빛을 하고 들었다. 현실에서의 우리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몽중임을 직감하면서도 현실인 것 같은 미묘한 기시감, 혹은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덧없는 기대의 순간. 그처럼 완벽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현실 이상으로 이상적인 꿈이었다. 오죽하면 떡볶이까지 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세계의 부품으로 정확히 들어맞았을까. 이거 집에서 꼭 만들어봐야지 싶을 정도로 미각을 두루 충족했던 떡볶이가 바닥을 드러낸 순간, 그는 조용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일어나자"고. 


  아아, 정말이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부풀어오를 것 같았다. 꿈에서도 낯이 빨개질 수 있단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왜 적당한 타이밍에,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아직까지도 하지 못하는지. 다음엔 꼭 내가 먼저 일어나자고 말해야지...라고 맙소사, 나는 꿈에서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넌지시 던진 그 말과 함께 깼다. 새벽 3시였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의 잔상을 뒤로 하고 다시 잠들려던 차에 바이크 폭주족들이 요란히 내는 엔진소리가 열린 창을 타고 올라왔다. 할리 데이비슨 동호회가 분명하다. 조깅 갈 때 가끔 마주쳤고, 새벽녘에도 종종 저리 달리곤 했다. "깊은 사랑이 죄라면 반으로 줄일게~"라는, 볼륨을 최대치로 높였을 것이 분명한 생각지도 못한 발라드도 오늘은 함께였다. 패기 넘치게 부릉부릉대는 바이크 소리를 베이스 삼아 쩌렁쩌렁 울리는 애절한 멜로디가 어찌나 모순적이던지. 웬 새벽의 불일치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큭큭 웃었다. 멀어지는 소리들을 따라 파르라니 색이 변하는 하늘을 마주하곤, 다시 잠이 들었다.

 

 

  중구난방 자동기술이지만 써 보니 속이 시원하다. 이렇게라도 남겨보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씩 더 남겨볼 생각이다. 휘발된 날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언제나 내게는 내 이야기가 제일 어렵지만, 이렇게라도 남기려고 만든 공간이니 열심히 조각들을 모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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