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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주말아침 출근의 자동기술법

by 디어샬럿 2018. 4. 21.

06:56 열차 탑승. 여느때 출근에 비해 조금은 늦었다. 그래도 토요일에 출근하는 회사원 치곤 빠른 편이겠지, 다독임인지 자랑인지 모를 속엣말을 읊조리며 차창에 비친 드문한 얼굴들을 본다. 요맘때면 조금씩 붐비곤 했던 지하철(이라 쓰고 자꾸만 ‘도시철도’라는 글자에 미련을 두게 되는 건 직업병인 듯)도 오늘은 영 한산하다. 고즈넉한 여유랄까, 넉넉한 아침이 늘어진 이 땅 밑의 공간을 열심히 지나고 있는 나의 주말 출근길. 주말 ‘이 시각’에 회사를 나가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괜찮다. 외려 집에서 늘어지다 꾸역꾸역 오후 즈음 되어 나가던 길보다 이 편이 더 좋은 듯도 하고. 일이 일찍 끝나면 교보에 들러 신간도 좀 보고, 미세먼지가 좀 걷히면 신나게 달려야지.

키마 카길이 쓴 <과식의 심리학>을 읽고 있다. 가볍게 보려 샀는데 생각보다 눈이 머물게 된다. ‘과식’을 촉진하는 사회적 매커니즘을 제법 체계적으로 풀어내는 점이 마음에 든다. 물론 개중 상당수가 인용이긴 하지만, 이만해도 어딘가 싶다. 오랜만에 만나는, 내 대학 시절을 가득 채웠던 학자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출퇴근길에 힘을 얻게 된다. 내게 이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 오로지 알고 싶어 이 사람들을 탐욕적으로 채웠던 때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내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시공이 있다는 것 - 생명의 근원 같은 시간이 내게 있다는 것에 항상 감사할 따름이다.

지난 주말은 제인 오스틴의 <설득>으로 보냈다. 너끈한 날들을 나기엔 역시 오스틴 소설이 최고다. 게다가 이번 것은 뭐랄까, 좀 더 ‘어른의 사랑’ 같은 느낌이라 한층 감정이입도 됐던 것 같다. 나는 앤의 입장일까, 아니면 프레더릭 웬트워스 쪽일까. 그때의 그 사람은 어느 편에 가까울까. 이제는 아예 무던해진 듯도 한, 내 시간의 틈에 머문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잘 지내죠? 한때는 미웠지만 이제는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 항상 행복하길. ‘행복’이란 말 이상으로 행복하길. 오빠가 진심을 다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쓰다 보니 알겠다, 나는 앤이로구나.

오늘 내 손을 거친 그것 역시 많은 이들이 아껴주기를. 문득 짜증 같은 것이 솟구치다가도, 그 어린 친구를 생각하면 한 번 더 참게 된다. 성급한 감정으로 그르치지 말 것. 심호흡 한 번 하고, 잘 어르고 달래야지. 오늘도 이렇게 배운다. 오늘의 의미를 놓치지 말며, 틈새마다 이 순간들을 새겨야지. 제법 괜찮은 하루가 시작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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