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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순간

달을 품은 다랑쉬

by 디어샬럿 2014. 7. 24.

 

 

  자는둥 읽는둥 제주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준비 후 곧장 다랑쉬오름으로 향했다. 기생화산이라곤 해도 해발 381m. 무시할 수 없는 높이다. 간간히 흩날리는 빗방울을 조금 걱정하며, 보기보다 막상 오르니 더 만만찮은 오르막을 묵묵히 올랐다. 말만 없었다 뿐이지 땀으로 범벅이 된 채였다.

  정상에 오르니, 여기가 꼭대기요 싶은 기운이 물씬 오른다. 하늘은 여전히 흐린데, 얼핏 공기는 파랗다. 살갗에 간질간질 닿아오는 바람이 좋아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내 공기에선 풀내음이 났다. 드문드문 그림처럼 새겨진 나무와 풀밭의 녹음은 끝이 없었다. 잿빛 아침을 건넌 제주행 비행기의 몽롱한 여독이 발 끝까지 씻기는 청명함. 적잖은 산과 언덕을 올랐지만, 이런 덴 처음이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풀은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온몸을 뉘었다가 일어서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던 초록. 순간 김수영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가, 그 언어들로도 묶어낼 수 없을 듯한 태초같은 움직임에 어딘지 숭고해졌다. 풀을 한바탕 더듬은 바람은 녹음을 입고서 여행자의 몸을 휘감아 온다. 초록물이 든 공기가 오장육부 구석구석까지 스며든다. 앙다문 혀끝으로 전해지는 여름바람의 축축한 맛. 이렇게 달큰한 바람도 다 있구나. 코끝만 스치고 마는 야박한 도시바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풀내음이 함뿍 배인 어느 오름의 바람이 되어버릴 듯, 혹은 그대로 함께 몸을 뉘어 풀이 되어버릴 것도 같고. 열일곱 이맘때 배운 산정무한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함뿍 붉은물이 든 단풍나무에 손을 뻗으니 그대로 나무가 되어버릴 것 같다던.

 

 

 

 

 

 

 

  숨 고를 겸 돌아본 능선 너머로 나즈막한 제주 일대가 펼쳐진다.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앉은 다른 오름들을 보노라니, 여기가 꽤나 높은 오름이라더니 참말인가 싶다. 그림 같은 현무암 밭에 아 여기가 진짜 제주구나 감탄하다, 곧 눈에 들어온 아기 배냇정수리 같은 아끈다랑쉬의 민꼭대기엔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엄마따라 눌러앉은 새끼다랑쉬는 별 기대 않은 관광객을 견딜 수 없게하리만치 귀여웠다. 평지에서 볼 땐 감흥없던 언덕이 이렇게 달라보이다니. 엄마 품의 자식은 뭐든 예뻐보인다더니, 진짜인 것 같다. 이토록 귀여운 자연이라니. 다른 의미에서 감격스러웠다.

 

 

 

 

 

 

  곧 눈을 돌려 본격적으로 마주한 거대한 웅덩이. 산 정상부터 중턱까지의 높이만큼의 흙이 뻥 뚫린 이곳은 분석구다. 이곳 분석구가 달을 품은 만큼 거대하다고 해 다랑쉬란 이름이 붙여졌단다. 직경만 2km 이상, 한라산 백록담보다도 규모가 커 지질학적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나. 학문적인 건 차치하고, 움푹 들어간 공간을 비탈 따라 메우는 보들보들한 초록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출입통제만 안 돼 있다면 바닥까지 내달리고 싶은 유쾌한 기분. 분석구와 맞닿은 하늘은 넘쳐 흐를 듯. 유홍준 교수는 저서에서 10년 전 이곳 바닥까지 달려갔다시던데, 거기서 보던 하늘이 그렇게나 장관이었다고.

  분석구 능선을 따라 걷다, 내려오니 더 가파른 길을 어찌저찌 딛고 왔다. 아끈다랑쉬가 다시 별 것 아니게 보이는 평지에서 잠깐 밀려드는 감흥을 아쉽게 다신 후는... 더 말하는 것조차도 피곤한, 숙소까지의 험난한 여정이었다. 엉뚱한 길만 알려주는 내비게이션과, 오르막 오르기가 무섭게 떨어지는 렌트카 연료 때문에 정말 한라산 고지에서 보험회사 부르는 줄 알았다. 다시는 리조트와 연계된 렌트카 따위는 빌리지 않으리. 이를 갈며 다짐하며 숙소에서 뻗어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피로가 어깨를 짓눌러온다.

  아! 그래도 산 도로를 탄 덕분에 무심하게 풀 뜯는 노루를 본 건 행운이었다. 그 노루는 정말 예뻤다. 잠깐 우리 쪽을 쳐다봤는데, 그런 눈... 처음 봤다. 다랑쉬랑 노루만으로도, 오늘은 성공이다. 실은 새벽부터의 일정에 다랑쉬만으로도 체력이 고갈됐으므로... 아, 나 언제 저질체력 된 거야. 슬프다.

  ...사진이 하찮다.

 

 

(20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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