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저녁은 유키 구라모토 콘서트였다. <유키 구라모토와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리처드 용재 오닐, 디토 오케스트라에 클래식 보컬 그룹 로티니까지 합류한 크리스마스 특별 공연. 덕분에 근 2년 만에 예술의전당엘 와 봤다. 한창 다니던 5~6년간 본 적도 없던 형형색색의 조명이 여기저기서 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연말 공연을 본 적은 없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음악만큼이나 엄격한 무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D 덕에 생전 앉아본 적 없던 박스석을 차지한 것도 감격이라면 감격이랄까. 합창석 혹은 3층 꼭대기석을 피해 처음 앉은 객석 다운 객석이다. 여길 위해 두 달 전에 예매했다며, D는 수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케스트라의 차이콥스키 선곡으로 공연은 시작됐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중 왈츠 파트. 모처럼의 실황이어선지 반가운 마음이 훅 일었다. 특유의 물결 치듯 흐르는 멜로디를 따라 아주 잠깐,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였던 것도 같다. 1 바이올린과 2 바이올린이 지휘자 양 옆으로 나뉘었지만 1 바이올린의 비중이 컸다. 왼쪽의 소리가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오케스트라 식 구성. 보조를 맞추는 2 바이올린의 옆과 뒤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무게 중심을 잡아준 덕에 안정성에서 큰 무리는 없었다. 결이 무난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리처드 용재 오닐이 곧 등장했다. 훔멜과 피아졸라의 곡이 차례로 연주됐다. 그의 연주라곤 CD로라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호불호를 떠나 일단은 흥미로웠다. 길쭉하고 보기 좋게 마른 외양만큼이나 일면 사람을 혹 하게 하는 면은 분명히 있는 연주. 앙상블 디토와 크레디아의 방향성에 크게 찬성하는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실력에선 이견이 없는 연주자구나 싶다. 차차 들어봐야겠다는 생각.
로티니의 공연 후 인터미션, 그리고 2부가 시작됐다. 클래식 공연장에선 듣기 힘든 환호와 함께 유키 구라모토가 등장했다. 손수 하나하나 적어내린 컨닝페이퍼에 눈을 떼지 못하며, 어느덧 환갑에 접어든 지도 한참인 이 저명한 연주자는 어설픈 한국어 인사를 건넸다. 쵸이 욘주에 와 주싱 요로붕 대다니 캄싸함니다. 웅얼대고 뭉개지는 타국의 언어로 농과 함께 가볍게 곡을 소개하는 그이를 보면서, 난데없게도 프로의식 네 글자가 머리를 스쳤다. 협주와 독주가 오갔다. 마냥 사람 좋아만 보이는 인상 후에 이어진 연주에는 내공이 가득했다. 견고하고 공고했다. 날고 기는 이들과의 콘체르토에도 제 색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 무릇 협연이란 양보를 가장한 상시 긴장상태와 같다. 아슬아슬한 긴장선을 이기지 못하는 연주는 금세 티가 나는 법이다. 이 사람의 연주는, 그 긴장선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달콤하고 유연한 멜로디 속에 감춰져 무대를 압도하던 날것의 긴장.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처음 접한 건 열다섯 즈음이었다. 절친한 B의 영향이었다. 피아노를 꽤나 쳤던 B는 유키 구라모토의 열렬한 팬이었다. 당시로서도 꽤 귀한 축이었던 CDP에는 언제나 유키 구라모토의 앨범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Romance를 특히 좋아했다. 예고도 없이 무방비한 귓가로 이어폰을 꽂아오는 B 덕에(?) 의도치 않게 나 역시 그이의 음악을 듣곤 했다. 그때의 나도 피아노라면 뒤지고 싶지 않은 꿈 많은 소녀였던지라, 그녀를 따라 악보를 사서 Meditation을 연주해 봤던 기억도 어렴풋하다. 그럼에도 끝끝내 내 취향의 영역에는 들지 못한 아티스트였다. 그의 명성과 음악이 여느 대중 아티스트를 능가함에도 나는 그의 음악에 일가견이 없다.
워낙 대중적인 넘버라 그런지 이질감은 없었다. 애초에 유키 구라모토 식 뉴에이지가 실험성을 기반으로 한 게 아닌 탓도 크다. 단순한 조성, 정형화된 진행, 한정된 주제의식... 이지리스닝, 혹은 대중성이 최우선에 있는 그의 음악세계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서 분명 비판의 대상이 되고도 있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든 유키 구라모토는 유키 구라모토였다. 연주에서 의도찮게 '그 다움'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던 나 역시 어쩌면 비평가들과 맥을 함께 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소담한 피아노 독주에 이어지는 장중하면서도 고혹적인 오케스트라 버전을 연이어 들으며 내내 생각했다. 음악의 경계란 무엇인가. 대중성은 왜 늘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대중성과 작품성은 대체로 반비례 관계라는 세간의 인식은 정당한가. 음악가는 왜 대중성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가.
예술에도 긴장관계가 있다.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의, 일종의 부등호 관계다. 창작자의 의도와 감상자의 수용이 등호에 가까울수록 작품은 숨을 쉴 수 있다. 태생적으로 예술이란 부등호일 수밖에 없지만, 그 철저한 등식 속에서도 어느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는 긴장이 필요한 법이다. 내게 있어 요즈음의 현대 예술은 극단적인 부등호다. 창작자의 주관과 입장이 무엇이 됐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으레 있을 법한 의견차마저 '감상자의 해석적 오류'로 치부하고 끝내버리고 마는. 해석의 다양성을 부르짖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도 해석의 틀을 제한해버리는 아이러니, 누군가의 자의식의 세계가 일방적으로 작품을 규정지어버리는 단순하고도 이기적인 모순이 온통 떠돌아다니는 '순수' 그리고 '현대' 예술 말이다.
굳이 의식세계까지 갈 것도 없이 일차원적 감성을 자연스레 스며들어오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자문했다. 대중과 감상자가 이해할 수 없는 예술과 음악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수많은 철학과 자의식과 이론과 기교로 점철된, 그러나 애호가마저도 등을 돌려버린 현대 클래식 음악을 생각했다. 감상자의 영역을 존중한다면서도 가장 감상자를 배척하고 있는 현대 예술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공연 내내 전짓불처럼 아른거렸다.
독주보다도 인상 깊었던 오케스트라 버전. 개인적으론 로망스 협연이 특히 와 닿았다. 참고로 유키 구라모토는 음대가 아닌 공대 출신이다. 도쿄공대 응용물리학이었던가... 뜬금없지만 클라이버도 공대 출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천재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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