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밀의 화원/일상100

지나간 대로 의미 있는 시간 또다시 제법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휘발된 날들 사이사이 남겨야 했을 사건도 마음도 분명 존재했을 거다. 적잖은 날들을 지나왔는데, 통과한 순간들을 곱씹어도 우러나오는 것이 없어 조금 서글펐다. 지나간 것이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는 건 그 시간을 충실히 체화할 수 있는 이에게 주어지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기록이든 기억이든, 인간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수단을 통해 남김으로써 시간을 소화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어디에도 남지 않은 내 ‘백지시간’들은 어쩌면 행방조차도 묘연해져 버린 게 아닐지. 상념이 여기까지 이를 때면 모로 누운 채 입술을 물어뜯으며 밤잠을 설친다. 서너 날은 일터에서 쪽잠을 자거나 밤을 새웠고, 서너 달 동안은 일상의 대부분을 회사라는 공고한 세계에 봉납했다. 당시의 그것은 하나의 .. 2021. 6. 24.
호모 넷플리쿠스의 변명 말콤X의 암살을 다룬 넷플릭스 6부작 다큐멘터리를 보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첫술을 들자마자, 신앙의 맹목성과 악의 상존을 푸코의 진자마냥 플롯 가득 흔들어대는 넷플릭스산 영화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상 개시용으론 다소 격하고 제법 질척인 영화의 뒤에, 지난해 발굴된 피라미드와 소셜 플랫폼의 필터버블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연이어 재생했다. 놀랍게도 이조차 넷플릭스였다. 또 하나를 더 보자니 어느새 밤이 깊었고, 며칠 읽지 못한 머리맡의 책에 손을 뻗어 몇십 페이지를 읽고선 눈을 감았다. 왜인지 잠걸음은 더디 왔고, 무의식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갖은 생각을 유튜브발 음악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 충실하게도 넷플릭스 그리고 각종 미디어를 오간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하루였다. 이쯤 되면 나야말로 미디어 생.. 2020. 11. 16.
시간을 통과하다 시간마다 색깔이 있다. 냄새가 있고 진동이 있다. 그 시기를 구성하는 사건들의 향취가 시간의 통로마다 배어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 양태를 지닌 그 시간들 중 하나를 건너가는 중이다. 아니, 그것을 '통과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전자가 능동태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후자는 보다 수동적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사건들, 같은 사건으로도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마다 다른 사실들, 제각각의 사실이 빚어낸 세계와 그 세계를 품은 시간을 온몸으로 투과해내고 있다는 말이 가장 적확하지 않을까 싶은 날들이다. 어쩌면 시간과 세계는 오직 발화(發話)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이렇게까지 다른 이야기들이 한 사건을 향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진군할 수도 있다는 것에 때로는 소름이 끼치곤 .. 2020. 3. 10.
조심해야 하는 사람 요 며칠 내 일상의 절반은 '타자-되기'의 실사 체험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마치 라캉의 수제자라도 되는 양 충실하고 올곧게 내 스스로를 타자화했다. 엄밀히 말하면 라캉 식 타자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어딘지 처량하기까지 한 작업이었지만 타인이 되어보긴 되어본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타인의 삶을 투영하느라 나의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시 실망하고 좌절하고 지쳐 마감하는 하루의 앞에서, 나는 불과 몇 달 전의 모든 것들을 돌이키고 있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최후의 방패막이었을 줄은. 그 마음을 몰랐고, 그 상황을 몰랐다.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생각한다. 그 고마운 마음과, 이제야 윤곽을 드러낸 또 다른 마음을. 나는 이따금 '겪는 게 최선'이라며 타인의 말보다 내 경험을 지나치게 앞세.. 2020.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