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밀의 화원/일상

평범한 말들의 힘

by 디어샬럿 2017. 2. 19.

 

책을 읽다보면 낯익은 표현을 마주할 때가 있다. 대개는 아주 전형적인 느낌을 주는 언어들이다. 일상어라면 그런가보다고 지나칠 텐데, 잘 쓰지 않는 말들이다보니 유독 눈을 두게 된다. 아직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올해엔 유독 '가 닿다'란 말과 만날 적이 잦다. 십 몇 페이지 걸러 이 단어를 쓰는 작가만 이번이 세 번째다. 나 역시 자주 쓰는 단어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적당한 온기와 밀도를 지닌 말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자주 여럿의 손이 닿다보니 특유의 선도를 잃은 느낌이다. 말이란 그래서 참 어렵다.

주말이면 보통 거실에서 책을 읽는다. 이따금 활자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들면 채널이 열심히 돌아가는 TV 화면과 마주한다. 주말 거실의 TV 선택권은 전적이다시피 아빠께 있다. 끈덕지게 이어지는 탐색 작업은 드물지 않게 선댄스 필름 채널에서 정지되곤 한다. 오늘도 덕분에 출품작을 띄엄띄엄 보았다. 영화 제목이 <재클린 아르헨틴>이었던가. 드문드문 본 탓에 플롯을 놓쳤다. 다만 기억에 남는 건 내레이션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어로 특별한 감각을 담아내는 문장들에 놀랐다. 영화의 말미에 아빠는 "감독이 참 시적으로 표현할 줄 아네"라셨다. "맞아, 표현이 참 좋다"며 맞장구를 치는 동안에 조금 생각했다. 그 말들을 시적이라 해도 될까. '시'란 말은 쾌활하면서도 살뜰한 그 일상어의 향연에 비해 어딘지 무거운 느낌이다. 시적이라기엔 상대적으로 담백하면서 훨씬 자연스러운 언어들이었다. 감독은 영상의 빈틈마다 감각적인 일상 언어를 알알이 박아넣었다. 문장은 영상의 공간마다 스며 영화에 풍미를 더하고 있었다.

하얗게 박히고 사라지는 글자들을 좇다 문득 대학교 1학년 2학기의 기억을 떠올렸다. 방송영상학을 가르치신 교수님의 말씀이었다. 영상을 잘 하는 사람도 많고 글을 잘 하는 사람도 많지만, 둘을 다 잘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 영상을 잘 찍는 사람이 글까지 잘 쓰면 어떻게 되는 줄 압니까? 그 사람은 무적이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영상을 잘 다룬다는 건 세상을 표현하는 감각이 좋다는 것이고, 글을 잘 쓴다는 건 세상을 보는 시선이 남다르다는 겁니다. 이걸 다 갖춘 사람이 만드는 콘텐츠는 어떻겠어요. 영상만 잘 하는 사람은 이 사람 죽어도 못 따라갑니다. 어떻게 따라갑니까, 세상에 대한 각도가 다른데.

만났다, 프레임 위로 느긋하게 사라지는 크레딧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런 사람을 십 년 만에 봤다. 가르침의 경직성만 남았던 말들이 어느덧 물컹물컹해져 깨달음의 틈으로 들어왔다. 교수님 말씀이 맞았다. 그때도 맞았고 지금은 더 맞았다. 글을 업은 영상의 힘은 정말로 셌다. 무엇보다 생활의 흔적이 진하게 스친 말이기에 더욱 힘이 강했다. 무던하지만 감각적인, 지극히도 평범한 말들은 그 어떤 언어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것들이 화합하여 빚어낸 문장의 맛을 오래건 음미하고 싶었다. 재클린의 묘연한 행방을, 억지로 일상으로 몸을 욱여넣는 주인공을 보며, 나는 새삼스레 흘러간 말들을 곱씹었다. 어떤 맛과 내음이 배어있을지, 찾고 또 찾아낼 마음으로.

 

'비밀의 화원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お互いの心が繋がってる感じって  (0) 2017.07.14
이런 날  (0) 2017.04.23
사진을 보다가  (0) 2017.02.17
  (0) 2017.01.29
이렇게까지 해야 돼?  (0) 2017.01.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