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머물러 있다. 사건에 열기를 불어넣는 건 순전히 나의 해석이다. 사건을 모아 이야기를 만드는 이, 이야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프리즘을 갖다대는 사람은 바로 나. 모든 것이 나,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이런 마음은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이 자꾸만 사건을 끌어오고 긴 꼬리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사건과 감정을 점착시켜 버리는 마음의 점성을 떨쳐내지 못하는 이런 날. 마음이 너무 커져서, 이야기에 자꾸만 그림자가 생긴다. 기어이 그늘이 지고야 마는 나의 어떤 이야기들. 나는 여전히 담백하지가 못하구나. 불현듯 질척이는 사건의 잔해들에, 그만 발걸음이 눅눅해지고 마는 어느 가을 저녁. 곱씹는 모든 것들에 습기가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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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그 시절의 책에서 그 시간을 누볐던 나와 만나는 요즘이다. 그때의 나는 어떤 색채를 지녔고, 어떤 자취를 남기는 사람이었을까. 수많은 찰나들을 건너며 나 역시 시간의 이런저런 틈새에 맞추며 바뀌어왔지만, 그렇게도 다양한 나의 모습들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나 답게’ 느껴지는 건 역시 그때의 나다. 학교 도서관 2-3층 서고를 오가며 읽을 책을 고민하던, 그러다 이따금은 남산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려 하버마스건 플루서건 닥치는 대로 빌려오곤 했던-

출퇴근길에 들추는 지그문트 바우만으로, 매 장의 귀퉁이를 접어내리며 문득 ‘살아 있다’는 감각에 몸서리쳐질 만큼 감사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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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줄곧 그곳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솔직히 고민했다. 그래도 맞는 것 같다.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아닌 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그렇게까지 나를 외면한 곳을, 단지 ‘남아 있는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으니. 게다가 그곳이라면 더더욱. 자기합리화래도 할 말은 없다. 그저 이젠 내가 후련하면 됐다는 생각 뿐이다. 덕분에 늘어난 휴일의 시간, 늘어지게 책이나 읽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읽던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이번 작품은 유독 독백이 많다. 철저하게 자의식으로 점철된 주인공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이 한 명 한 명의 등장인물이 진정 ‘객관적인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인지 점진적으로 의심의 폭을 넓히게 된다. 오로지 주관적이며 심지어는 왜곡까지 가해진 듯한 주인공의 세계 속 인물들의 현실성에 의문을 품으며 읽는다. 나는 이 이의 시각을 온전히 믿어도 되는 걸까. 아리아드네의 실을 쥐어들고서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발을 내딛는 테세우스처럼, 나는 무엇도 완전히는 믿을 수 없는 텍스트의 굴을 화자의 시각에 의지한 채로 비틀비틀 통과한다. 그러다 문득, 어제의 그 말을 떠올렸다.

-

나에 대한 정의랄까, 인상의 범주에 들어오지도 못한다고 여겼던 나의 면모를 타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날엔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진다. 나의 시야가 오롯하고도 완전한 나를 담아낸다고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내가 판단하는 나의 영역에서 ‘나’라는 존재의 일부일 것이란 가능성조차 품어본 적 없는 ‘나라고 일컬어지는’ 모습을 누군가를 통해 알게 된다는 건... 꽤나 기분이 묘하다. 좋은 의밀까, 내가 나를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 실은 남들은 나를 그렇게 보고 있는 걸까. 난데없이 찾아들던 생각들과 마주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던 어제와 오늘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신경이 참 많이 쓰였을 텐데, 이젠 아무렴 그마저도 나이지 않을까 넘기게 된다. 뭐 어때, 그래도 어때, 다 나인 것을. 그런 뜻으로 말할 아이도 아닐 뿐더러, 설령 그런 의미였대도 뭐 어때. “생명력” “하고잽이” “활력”이라는 언어들이 애써 희석해 주었던 나의 어떤 면모, 실은 내 스스로 그런 말까지 들을 ‘의지에서의 자격’이 있나 겸연쩍어지는 그 면모를, 정말로 직설적이고도 전투적으로 드러내어 준 S의 말을 생각했다.

“누나한텐 약간 뭐랄까. 세상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하는 느낌 있잖아요.”

조탁이 가해지지 않은 원석의, 혹은 전혀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말들. 나를 향한 나름의 느낌에 단지 언어를 그대로 덧씌운 정도이기만 한, 정을 전혀 맞지 않은 생생한 단어들을 생각할 수록 조금 웃음이 난다. 세상을 이기기엔 내가 너무 작은 존재인 것은 같지만 네 안에서나마 내가 그런 사람이라니 어쩌면 나는 참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사람이겠거니 싶다.

“아니야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말 뒤에, 고마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단 한 번도 승패의 관점으로 세상을 대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실은 하고 싶었다. 이루지 못한 것들이야 있어도 소중한 기회들과, 너를 비롯한 좋은 인연들과, 두 발을 딛고 살아가게 해 준 터가 있는 나의 세상과 삶의 모든 틈에 감사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관뒀다. 그의 생각에 꼭 반박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S의 눈에 비치는 그런 나 역시도 나일 것이며, 그 아이의 시각도 온전히 존중돼야 하는 것이니. 그러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늘 그랬듯 이렇게 잘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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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어 있는 어떤 이름들에서 이제 더는 급작스런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게 됐다. 또 다른 이름으로 잊게 된 것도 아니고, 느닷없는 사건(이라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따뜻한)으로 지워지게 된 건 더더욱 아닌데. 옅어졌다. 내 시간들을 꾹꾹 누르고 때로는 맹렬히 할퀴기도 했던 이들이니 흔적이야 남았지만, 이제는 그 이름들을 보아도 그저 그런 자욱 정도로 그치는 느낌이다.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면 쑤욱 다시 차오르는 살갗처럼.

하필 이렇게 붙냐, 보면서 조금 웃었다. 이름순 나이순 사건발생순 그 모든 순서를 정확히 지키며 위아래 사이 좋게 배열된 어느 이름들. 이제 더는 내 심장이 쿵쿵 부딪어 오지 않는 이름들. 울대까지 올라오는 진동에 눈길을 피하게 만들었던,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대면할 수 있게 된 자모의 결합. 한때는 그 문자의 조합을 소리의 영역으로 변환시켜보는 것만으로도 못 견디게 아팠던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게 됐다. 그런 당신들의 가장 대표적인 증명의 기록이 나란히 선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났다. 보니까 좋으네. 잘 지내죠?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길.

내일은 그곳에 찾아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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